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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글을 올린 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매월 하나씩의 게시물을 올리고자 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래 올리려던 글이 있었는데, 자료 수집과 이미지 작업, 집필 등에 계속 시간이 투입되다 보니.. 어느덧 소논문 수준으로 방대(?)해졌기에 조금 더 간결하게 다듬고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일피일하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고요. 일단 이번 글은 예비로 준비하던 사재감 이야기로 대체합니다. 이 글도 짧게 쓰려고 했지만, 이것저것 덧붙이다 보니 이미지 숫자가 원래 글의 절반을 넘었네요. (이번에는 문체를 부드럽게 써 보겠습니다.)



경복궁(景福宮) 서쪽에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뜨고 있는 마을, 서촌(西村)이 있습니다. 인왕산(仁王山)과 경복궁 사이 지역을 모두 서촌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옛날 조선시대의 서촌(경복궁 서쪽의 마을)을 말하는 것에 가깝고, 오늘날 '핫 플레이스(Hot place)'로서의 서촌은 경복궁의 서쪽 담장(궁장)에 바로 붙어 있는 마을 가운데 예전의 정취를 아직 간직하고 있는 효자동(孝子洞), 창성동(昌成洞), 통의동(通義洞) 일대를 주로 지칭합니다. 특히 골목길과 한옥이 아기자기하게 남아 있는 통의동이 대표 지역이죠.

이 '서촌'의 중심지와 같은 동네 통의동에 사재감(司宰監)이라는 조선시대 관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학, 건축학 관련 논문, 발굴조사보고서 등에서 사재감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는 내용을 보지 못했습니다. 표지석 또한 설치되어 있지 않으므로, 현재 학계에서는 사재감의 위치를 대략 경복궁 영추문 옆의 옛날 매동초등학교 소재지[각주:1]에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사재감 청사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서촌(西村) 지역1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도성대지도, 1750년대)


위 1번 지도는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제작 시기를 적어 보면 영조(英祖) 임금 집권 후반기가 시작되는 1750년대 즈음입니다.

사재감 관청이 왼쪽 방향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관청 주요 건물 또는 대문의 방향이 서향(西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재감의 소재 지역은 의통방(義通防)이며, 동 이름으로는 대동(帶洞, 띠골)과 매화동(梅花洞) 사이입니다. 매화동은 매동(梅洞)이고, 사재감전로(司宰監前路, 사재감 앞길)라는 명칭 몇몇 문헌에 등장하므로 그렇게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대동 위에 의통방 후동계(後洞契), 소대동(小帶洞, 작은 대동), 순화방(順化坊), 서금교(西錦橋), 매화동 오른쪽으로 의통방 연추문계(延秋門契), 사재감 서쪽으로 준수방(俊秀坊), 준수방 준수방계(俊秀坊契), 지도 왼쪽 하단에 체부청동(體府廳洞) 지명이 보입니다. 연추문계는 경복궁 서문의 공식 명칭을 따라서 영추문계(迎秋門契)라고도 하였으며, 체부청동은 체찰사부(體察使府)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지명입니다.


조선시대 80여 개 중앙 행정관청 가운데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의금부(義禁府) 등이 널리 알려진 1급 관청이라면, 그보다 장관(長官, 기관장)의 직급이 낮지만 사람들이 교육, 역사극, 역사소설 등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을 만한 관청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 교서관(校書館), 사역원(司譯院), 훈련원(訓鍊院) 등을 2급 관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급 관청은 이름도 생소한 나머지 50~60개 관청이며, 사재감도 이러한 3급 관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재감은 호조(戶曹)의 속아문(屬衙門), 즉 호조의 소속 관청으로 궁궐에 어육(魚肉), 소금[鹽], 장작[燒木], 횃불[炬火] 등을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본래 정3품 당하관인 사재감정(司宰監正)이 수장인 정3품 아문(衙門)이었으나, 후대(아마도 영조 임금 초기)에 종4품 첨정(僉正)으로 장관의 직급이 낮아졌습니다(종4품 아문).

청구요람(靑丘要覽) 도성전도(都城全圖) 서촌(西村) 지역2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청구요람 도성전도, 1848년경)


위 2번 지도는 1번 지도와 같은 지역을 보여주는 1848년경 제작된 지도 〈청구요람(靑丘要覽)〉 도성전도(都城全圖)의 일부분입니다.

사재감 관청이 남쪽을 향한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번 지도는 서향이었으나, 2번 지도에서는 남향인 것입니다.

사재감에 관한 문헌 중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 〈경도하(京都下)〉에는 '사재감. 북부 의통방에 있다.'[각주:2]라고 되어 있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권1. 〈경도(京都)〉 항목에는 '처음에는 의통방에 있었는데 뒤에 순화방으로 옮겼다.'[각주:3]라고 적혀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84년(성종15)에 완성되었던『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보완하여 1530년(중종25)에 증보한 것이고, 『동국여지비고』는 이를 다시 보충하여 19세기, 즉 고종 초기인 1870년경에 저자 미상으로 간행된 책입니다.

1830년(순조30)에 간행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사재감의 위치를 기존 의통방(義通防)이 아닌 순화방(順化坊)으로 적고[각주:4] 있기 때문에 그보다 뒤에 간행된『동국여지비고』에 사재감 청사 항목이 그와 같이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사재감 청사가 매우 짧은 거리나마 의통방에서 순화방으로 이전하면서 청사 건물의 방향도 서향에서 남향으로 변경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 자료를 살펴본 결과, 순화방으로의 청사 이전 시기는 대략 정조(正祖) 임금의 치세 후반기인 1790년대로 추정됩니다. (실제 청사를 이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도상의 그림 형태 차이 또는 의통방과 순화방의 행정구역 조정에 따른 차이에 불과한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재감 아래쪽으로 매화동(梅花洞, 매동), 창의궁(彰義宮), 금청교(禁淸橋), 체부청동, 위쪽으로 대동(帶洞), 준수방, 왕정동(王正洞) 지명이 보입니다.

창의궁은 영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의 일부이고[각주:5], 금청교는 경복궁 서편을 흐르던 백운동천(白雲洞川)에 놓여 있던 돌다리입니다. 줄여서 금교(禁橋)라고도 하였습니다. 위 지도에서는 금청교 첫 글자 '금(禁)'만 보이므로 실제 다리 위치는 더 아래쪽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28년 6월에 백운동천 복개 공사로 인해 해체됩니다.

한국경성전도(韓國京城全圖) 서촌(西村) 지역3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한국경성전도, 1903년)


위 3번 지도는 경부철도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社)에서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광무7)에 발행한 〈한국경성전도(韓國京城全圖)〉의 일부분입니다. 경부철도주식회사는 일본인들이 이권 확보를 위해 세운 회사이며, 지도 발행도 회사 소재지인 일본 동경(東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재감내(司宰監內)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풀어서 '사재감 안쪽 동네' 정도가 되므로, 이 위치에 사재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빨간 화살표로 표시한 엎어진 ㄱ자 형태의 건물에 주의합니다.


사재감내 위쪽으로 대동(帶洞), 포정동(匏井洞), 왕정동(旺井洞)이, 아래쪽으로 매동(梅洞, 매화동), 영추문전(迎秋門前), 영추문, 서문후동(西門后洞, 西門後洞)이 있습니다. 아래 다리는 헌교(憲橋)이며, 지도 왼쪽으로 통동(通洞), 사포동(司圃洞), 누각동(樓閣洞) 등이 순화방이라는 큰 글자 아래에 흩어져 있습니다. 최소한 이 지도에서는 통의방(通義坊)[각주:6] 표기가 없고, 이 일대가 모두 순화방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인왕산(仁王山)을 인왕산(仁旺山)이라고 고쳐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문헌을 고증한 결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도 (仁王山 표기가 다수였기는 하지만) '仁王山'과 '仁旺山'이 혼재되어 사용되었습니다. 2번 지도의 왕정동(王正洞)과 위 3번 지도의 왕정동(旺井洞) 표기 차이도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 서촌(西村) 지역4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경성부시가도, 1911년)


위 4번 지도는 일제강점시 시기인 1911년[각주:7]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에서 인쇄한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의 서촌 일대입니다. 3번 지도의 빨간 화살표 부분은 동일하게 표시하였습니다. 그 아래에 사재감전동(司宰監前洞)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사재감 앞 동네'가 됩니다. 따라서 사재감은 (이 지도에 따르면) 사재감전동으로 표기된 지점의 북쪽 또는 동쪽에 있었던 것이 됩니다.


사재감전동과 같은 구획에 매동, 대동의 동명이 있고 영추문 가까운 방향에 매동학교(梅洞學校)가 있습니다.[각주:8] 매동학교는 1895년(고종32)년 8월에 장동관립소학교(壯洞官立小學校)로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4개 소학교[각주:9] 중의 하나입니다. 같은 해 9월에 장동관립소학교가 매동(梅洞)의 예전 관상감(觀象監) 부지(㉠ 위치)로 이전하면서 매동관립소학교(관립매동소학교)로 개칭되었고[각주:10], 1900년 12월에 중추원(中樞院)이 매동소학교로 이설(移設)되면서 매동소학교는 대루원 바로 위쪽의 통례원(通禮院) 직방(直房)[각주:11]으로(㉡ 위치) 이사하였습니다. 이후 관립매동보통학교(1906)로 변경되었으며, 앞에서 각주로 기술한 것처럼 1933년에 필운동으로 신축 이전한 후, 매동공립심상소학교(1938), 매동공립국민학교(1941), 매동초등학교(1996)로 재차 교명이 변경되었습니다.

매동 위쪽에는 범씨궁동(范氏宮洞), 경찰관연습소(警察官練習所), 왕정동, 창성동(昌城洞)이, 아래쪽에는 서문후동,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사택(社宅), 창의궁이 있고, 사재감전동 서쪽으로 장동(壯洞), 헌교, 반정동(半井洞), 사포동, 누각동, 체부동(體府洞) 등이 지명이 보입니다.

범씨궁동은 범씨궁(范氏宮), 범숙의궁(范淑儀宮)이라고도 하며, 철종(哲宗) 임금의 후궁인 숙의(淑儀) 범씨(范氏)가 살던 곳입니다.[각주:12]

경찰관연습소는 위 지도를 발행한 경무총감부 산하의 경관연습소(警官練習所)이며, 1909년(융희3) 5월에 이곳 부지[각주:13]에 자리를 잡았다가 1917년 11월 5일에 광화문 앞의 조선시대 이조(吏曹) 및 한성부(漢城府) 터로 옮겨갑니다. 창의궁과 그 주변 6천여 평의 가옥을 1909년경에 매각한 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에 대하(貸下, 임대)한 자리한 들어선 대규모의 동척(東拓) 사택도 눈에 띕니다.


앞서 수록한 4개 지도에서 살펴본 지역이 서울 시내의 어느 부분인지 감이 잘 안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넓은 지역을 조망한 지도를 올려봅니다.

경성부관내지도(京城府管內地圖), 서촌(西村) 지역5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경성부관내지도, 1918년)


위 5번 지도는 1918년 1월에 발행된 〈경성부관내지도(京城府管內地圖)〉입니다. 경복궁 서쪽 지역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광화문(光化門) 위치를 확인하면 빨간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어느 곳인지 손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지명은 앞의 4번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追門)의 위치가 실제와 다르게 상당히 아래쪽에 표시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색 화살표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시 시기에 만들어진 대부분 지도에 표기된 영추문(1926년 철거)의 위치이고, 녹색 화살표는 현재 영추문(1975년 복원)의 위치입니다.

1917년 11월에 광화문 앞 경기도청(京畿道廳) 남쪽 지역으로 이전해 간 창성동 경관연습소가 여전히 지도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같은 해 12월 혹은 이듬해 1월 시점에도 이전 작업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지도 북쪽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가 보입니다. 고종 황제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가 하사한 부지[각주:14]에 1906년(광무10) 4월 개교한 진명학교(進明學校)의 후신으로, 지도가 제작된 시점에는 4년제의 진명여자보통학교, 3년제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는 1989년 8월에 양천구 목둥(木洞)으로 신축 이전합니다.

지도 서쪽에 배화학교(培花學校)가 보입니다.[각주:15] 위 지도 아래쪽에 있는 내자동(內資洞)에서 1898년(광무2) 10월에 설립된 배화학당(培花學堂)[각주:16]이 1913년에 누하동(樓下洞)으로 이전하였으며, 현재는 배화여자대학교(培花女子大學校), 배화여자고등학교(培花女子高等學校), 배화여자중학교(培花女子中學校) 등의 교육기관이 밀집해 있습니다.


지도 명칭 부분의 파란색 화살표는 하편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경성지형도(京城地形圖), 서촌(西村) 지역6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경성지형도, 1921년)


위 6번 지도는 1921년에 측량하고 1922년 7월에 일제(日帝) 참모본부(參謀本部)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인쇄한 〈경성지형도(京城地形圖)〉의 일부분입니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에 공터 부지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앞의 지도와 대부분 비슷한데, 기존 경관연습소 부지에 체신리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 체신이원양성소)가 들어서 있는 것이 크게 차이 나는 점입니다. 조선총독부 체신국(遞信局)에서 체신 사업에 관계되는 각급 종사원을 양성하기 위해 1918년 1월 12일에 체신리원양성소를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5월(4월?)에 경관연습소 부지를 인수하여 사용하다가 1936년 12월에 용산 지역으로 옮겨갔습니다. 이후 1946년 9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府) 요인들이 주축이 되어 개교[각주:17]한 국민대학교(國民大學校)가 1947년부터 교사(敎舍)로 사용하였고, 국민대가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전한 1971년 9월 이후에는 문화재관리국, 정부기록보존소 등의 정부 기관이 들어섰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 바로 위에 백송(白松) 표기가 보입니다.[각주:18] 1962년 12월 3일에 천연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던 흰색을 띠는 소나무, 즉 통의동 백송이 있던 곳입니다. 수령(樹齡)이 600년 혹은 300년이라고 하는데, 1990년에 7월 17일에 돌풍으로 쓰려져 수명을 다하였고 1993년 3월 24일에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되었습니다.

북서사재감(北署司宰監) 실측 도면7번 도면 - 사재감(司宰監) 청사 실측 도면 (1908년 5월)


위 7번 도면은 1908년(융희2) 5월 31일에 측량된 〈북서사재감(北署司宰監)〉 실측 도면입니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반인들이 황실 또는 국가(관청) 소유의 건물을 빌려 쓰기 위해 제출한 청원 관계 문서인『가사불허차에 관한 문서 3호(家舍不許借에關한文書三号)』에 첨부된 도면으로, 다른 가사불허차(家舍不許借), 토지불허차(土地不許借) 도면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정밀하게 실측되었습니다. 축적은 200분의 1. (1:200)

북서는 1895년(고종32) 윤5월에 한성부의 북부(北部)를 개칭한 것이고, 도면 오른쪽의 비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면적[總積] : 800.97평(坪)
건물(建物) : 33칸반[韓製間計]
갑(甲) : 3칸, 신당(神堂)
을(乙) : 10칸, 대청(大廳)
병(丙) : 5칸반, 마구간[馬廐]
정(丁) : 8칸, 주접실(住接室)?
무(戊) : 4칸, 마구간[馬廐]
기(己) : 2칸, 대문(大門)

건물 항목의 '한제간계(韓製間計)'는 '한국식 건물(한옥)의 칸[間] 합계(계산)' 라는 뜻입니다. 갑(甲) 건물 신당은 조선시대 관청마다 있었던 부군당(府君堂)이며, 을(乙) 건물 대청은 사재감의 기관장이 근무하는 본청(本廳)입니다. 정(丁) 건물 주접실(住接室)은 생소한 단어라서 용도가 불분명합니다. 주접(住接)은 '임시 거주지'인데, 한자 '주(住)'의 식별이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하급 관원이나 서리의 근무 공간이었으나 사재감 폐지 이후에 다른 용도로 활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3번 지도에서 언급한 빨간 화살표의 엎어진 ㄱ자 건물 모양과 위 도면의 대청(甲) + 마구간(丙) 결합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재감 부지의 전체적인 모양이 6번 〈경성지형도〉에서 역시 빨간 화살표로 표시한 공터 부지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면의 측적도 들어맞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재감 청사의 위치는 6번 그림의 지도에서 화살표로 표시한 지점이 됩니다. 지번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91번지입니다. (짝짝짝)


※ 사재감 청사 위치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본 글의 결론은 이미 나온 것과 같습니다. 다음 하편에서는 사재감 터의 변천에 관한 내용을 중점으로 할 예정입니다. 하편 열람하기 (링크)


  1.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7번지, 통의동 매동초등학교 (1933년 1월 19일에 종로구 필운동 32번지로 신축 이전) [본문으로]
  2. 在北部義通房(재북부의통방) [본문으로]
  3. 初在義通坊後移順化坊(초재의통방후이순화방) [본문으로]
  4. 司宰監在北部順化坊(사재감재북부순화방) [본문으로]
  5. 1714년(숙종40)년 작성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즉위 전 군호)의 준호구(准戶口, 호적등본)에 기록된 주소 :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의통방(義通坊) 연추문계(延秋門契) 7통(統) 5호(戶) [본문으로]
  6. 1894년(고종31)에 의통방(義通坊)이 통의방(通義坊)으로 개칭됨 [본문으로]
  7. 측량은 명치13년도(1910년)에 실시됨 (경성부시가도 범례 비고 부분 기록) [본문으로]
  8.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7-4 일대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7길 6-1 인근) [본문으로]
  9. 장동(壯洞), 정동(貞洞), 묘동(廟洞), 계동(桂洞) 네 곳에 소학교를 설치함 [본문으로]
  10. 11월에 매동의 예전 대루원(待漏院)으로 이전하였다고 함 (매동초등학교 역사 기록) [본문으로]
  11. 금부(禁府, 의금부) 직방(直房)이었다고도 함 (매동초등학교 역사 기록) [본문으로]
  12.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자하동(紫霞洞) [본문으로]
  13.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117-6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39) [본문으로]
  14.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67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57) [본문으로]
  15.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149 일대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1길 34 인근) [본문으로]
  16. 설립 당시 명칭은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 [본문으로]
  17. 국민대학관(國民大學館) 설립인가는 1946년 12월 18일, 재단법인 및 대학 인가는 1948년 8월 10일. [본문으로]
  18.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35-15 (건물이 아니므로 도로명주소 없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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