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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필리(刀筆吏)란 무엇인가


도필리(刀筆吏)는 이 블로그의 필명(筆名)이다.

도필리는 칼 도(刀), 붓 필(筆), 아전 리(吏)의 조합이다. 종이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 동양에서는 흔히 죽간(竹簡)에 붓으로 글을 썼다. 죽간은 대나무 조각을 말하는 것으로, 형태와 재질에 따라 죽책(竹冊) 또는 목간(木簡)이라고도 한다.

죽간은 대략 아래와 같은 모습이다.

죽간(竹簡) 두루마리죽간(竹簡) 목간(木簡) 두루마리


멀고 먼 옛날 시대를 그린 영화나 사극을 본 사람이라면, 혹은 삼국지(三國志)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위 이미지와 비슷한 소품이나 아이템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죽간에 글을 쓰다가 오탈자가 났을 경우에, 그 글자 부분을 칼로 긁어내 삭제하는 일을 맡은 아전(衙前, 하급 관리)을 도필리라고 하였다. 도필리의 첫 글자 도(刀)가 바로 대나무 조각에 쓴 글자 부분을 긁는 도구를 뜻한다.

예를 들어, 글을 직접 쓰는 관원(상급 관리)이 "여기 잘못 썼네" 하면 도필리가 칼로 글자를 깎아내는 식이다. 또는 상급 관원의 명령을 불러주는 대로 죽간에 글자를 쓰다가 필요하면 고치고 다시 썼기에, 즉 칼과 붓을 모두 한 손에 다루었기에 도필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록에 따르면 주로 형정(刑政) 업무를 맡은 하급 관리를 지칭한다고도 한다.


글자를 긁어낸 모습을 그려 보면 아래와 같다. 도필리의 칼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깎아냈는지는 고증하지 않았다. 그저 상상으로 그린 것.

도필리(刀筆吏)도필리(刀筆吏)


내가 '도필리'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이 각고의 노력 끝에 집필한 『사기(史記)』에서였다.

한(漢)의 전장군(前將軍) 이광(李廣)의 전기인 열전(列傳) 제4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같은 한의 구경(九卿)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의 합전(合傳)인 열전 제60.〈급정열전(汲鄭列傳)〉 등에 나온다.

"(더군다나) 나는 이미 60여 세로, 새삼 지금에 와서 (나를 심문하는 자로) 도필리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각주:1] - 자결하기 직전 이광의 말, 〈이장군열전〉

"세상에서 흔히 말하기를, '도필리를 공경(公卿) 벼슬에 앉혀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과연 옳은 말이다."[각주:2] - 급암이 혹리(酷吏)[각주:3] 장탕(張湯)을 지목하여 한 말, 〈급정열전〉



이렇듯 도필리는 그저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원래부터 하던 일만 반복하는 하급 관리일 뿐, 스스로 어떤 이론을 세우거나 주장 또는 의견을 제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내가 이러한 필명을 쓴 것은 스스로 겸손해서가 아니라, 실제 그러하기 때문이다. 검색만 하면 여기저기에서 모을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가끔 몇 자 끄적일 뿐이기에.

더하여, 공직에 있었던 적이 없으면서 필명에 리(吏)를 넣게 되었으니 이것은 참칭(僭稱)이다.



  1. 且廣年六十餘矣 終不能復對刀筆之吏 [본문으로]
  2. 天下謂刀筆吏不可以爲公卿 果然 [본문으로]
  3. 가혹하고 무자비한 형벌을 위주로 백성을 다스린 관리 [본문으로]
刀筆吏, 도필리,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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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서편, 서촌(西村)에 있던 관청 사재감(司宰監) 터 - 하편

※ 같은 제목의 글 상편(링크)에서 이어지는 사재감(司宰監) 청사 이야기입니다. (상편과 달리 이번에는 문체를 원래대로 써 보겠습니다.)



지난 상편에서 재정을 담당한 호조(戶曹) 관청의 속아문(屬衙門, 소속 관청)인 사재감의 위치를 살펴봤다. 이번 하편은 사재감 청사 터의 변천을 중심으로 하는 내용이다.

경성지형도(京城地形圖) 통의동(通義洞) 지역8번 지도 - 서촌 일부 지역 (경성지형도, 1915년)


위 8번 지도는 1915년에 측량된 〈경성지형도(京城地形圖)〉의 일부분이다. 상편의 6번 지도와 동일하게 일본 참모본부(參謀本部)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제작한 1만 분의 1 축적 지형도이다.

사재감 터를 하늘색으로 표시했는데, 상편의 7번 실측 도면에서 살펴본 건물 3채가 표시되어 있다. 빨간 화살표로 표시한 것이 그것으로,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신당(神堂, 부군당), 대청(大廳), 주접실(住接室)이다. 상편 6번의 1921년 지형도에서는 건물이 모두 사라졌지만, 1915년 당시에는 주요 건물이 모두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좌측으로 활엽수가 세 그루가량 식재되어 있다. 지형도 '범례(凡例)'에 독립수(獨立樹)가 침엽수(鍼葉樹)[각주:1], 활엽수(濶葉樹)[각주:2]로 구분되어 있는데, 사재감의 나무는 활엽수이고 지형도 아래쪽에 빨간 점으로 표시한 백송(白松)은 (소나무니까 당연히) 침엽수이다. 이 사재감 나무들과 백송은 상편 6편의 1921년 지형도에 더욱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 표시된 지명은 대부분 앞에서 살펴본 지도와 같다(상편 글의 5번 지도 참고).

경성부지적원도(京城府地積原圖) 서촌(西村) 지역9번 지도 - 서촌 일부 지역 (경성부지적원도, 1912년)


위 9번 이미지는 1912년에 제작된 〈경성부지적원도(京城府地積原圖)〉이다.

빨간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의 구역이 대문 우측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상편의 7번 실측 도면 외곽 형태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파란 화살표는 사재감 남쪽에 있었던 대문(大門)으로 향하는 골목 입구이다. 대동(帶洞)과 서문후동(西門后洞) 글자가 표시된 부분의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사재감 입구가 있는 이 길이 바로 1번 지도에서 나왔던 사재감전로(司宰監前路)이다. 참고로, 서문후동의 서문(西門)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社宅) 자리에 있던 창의궁(彰義宮)의 서문을 말한다.

녹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구역은 상편 1번의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에 표기된 사재감 청사의 위치이다. 고지도에 따라서는 사재감이 보라색 사각형 지점에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실제로 18세기까지 사재감이 '사재감전동(司宰監前洞)'으로 표시한 지역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사재감 청사로 가는 입구가 서향(파란 화살표)이었기 때문에 1번 지도에서 그렇게 사재감 위치를 기재한 것인지는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상편 2번 지도의 설명 부분에서 잠시 언급했던 추정 내용을 요약하자면,

1) 사재감 청사가 녹색 사각형(㉠ 위치) 또는 보라색 사각형 지역에 있다가 빨간 화살표(㉡ 위치) 지역으로 이전했다.

2) 사재감 청사 이동은 없었다. 줄곧 ㉡ 위치에 있었으며, 다만 ㉡ 지역의 행정구역이 의통방(義通坊, 통의방)에서 순화방(順化坊)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3) 사재감 청사 위치가 실제 이동했고 더불어 행정구역 조정도 이루어졌다.

의 3개로 정리할 수 있다. 1) 번 주장을 유력하게 하는 증거는 각종 지도 표기와 문헌상의 기록이고, 2) 번 혹은 3) 번 입장을 검토할 수 있는 이유는 곧이어 살펴볼 내용 때문이다.

경성부지적원도(京城府地積原圖) 통의동(通義洞) 지역10번 지도 - 대한제국 시기 통의동 일대 (경성부지적원도, 1912년)


위 10번 지도는 지적원도에 1906년(광무10) 작성된 이른바 〈광무호적(光武戶籍)〉의 기록과 1912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査事局)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기록을 비교하고 추적한 후, 그 결과를 정리하여 필자가 임의 기재한 것이다.

보라색 글자는 1912년 당시 예전 순화방(順化坊) 지역의 국유지(國有地)이다. 녹색은 예전 통의방(의통방) 지역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소유지.

ㄱ) 창성동 117번지, 국유 2,268평 : 경관연습소(警官練習所) 부지
ㄴ) 통의동 7번지, 국유 1,658평 : 매동보통학교(梅洞普通學校) 및 관사(官舍) 부지
ㄷ) 통의동 28번지, 국유 196평 : 조선총독부 관사 부지로 활용
ㄹ) 통의동 29번지, 국유 202평 : 조선총독부 관사 부지로 활용
ㅁ) 통의동 91번지, 국유 790평 : 예전 사재감 청사 터
ㅂ) 통의동 35번지, 동양척식주식회사 6,381평 : 동척(東拓) 사택 부지 (예전 창의궁 터)

작은 숫자들은 통호(統戶) 번호이다. 예를 들어 3-8은 3통(統) 8호(戶), 71-1은 71통 1호가 된다. 지명 역시 1906년 호적표(戶籍表)에 기재된 내용이다. 역시 짧게 줄여 적은 것으로, 예를 들어 '사재감계 대동'은 실제 호적표에 '북서(北署)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 대동(帶洞)'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지적원도 위쪽에서부터 기재된 호적표상의 지명을 간추려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장동(壯洞) : 사재계(司宰契) 장동
대동(帶洞) : 사감계(司監契) 대동
사재감계(司宰監契) 대동(帶洞)
사재감계(司宰監契) 왕정동(旺井洞, 王井洞)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장동(壯洞)
상패계(上牌契) 사재감후동(司宰監后洞, 司宰監後洞)
후동(後洞) : 사재감계 후동
사재감내동(司宰監內洞) : 사재감내계(司宰監內契) 사재감내동
마병영내동(馬兵營內洞) : 사재감계(司宰監契) 마병영내동
북장동(北壯洞) :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북장동
상패계(上牌契) 반정동(半井洞)
전동(前洞) : 사재감계(司宰監契) 전동
사재감계(司宰監契) 하패동(下牌洞)
사재감계(司宰監契) 매동(梅洞)
매동(梅洞) : 사재감계(司宰監契) 매동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누각동(樓閣洞)
누각동(樓閣洞) : 사재감계(司宰監契) 누각동
사재감계(司宰監契) 체부동(體府洞)
사재감전동(司宰監前洞)
사재감계(司宰監契) 장동(壯洞)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에 호적을 작성할 때, 관청에서 나온 관리가 일정한 양식에 맞게 일괄 기록하지 않고, 호적을 신고하는 각 가옥의 호주(戶主)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상세 주소를 호구조사 관리에게 불러줬거나 스스로 문서에 적어 관청 혹은 관리에게 제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웃한 집 사이에도, 같은 통호 안에서도 위 지도와 간추린 지명에서 보는 것처럼 세부 지명(계, 동)이 제각각이다.


1906년 광무 호적을 기준으로 할 때, 노란색 글자는 순화방(順化坊)이고 하단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백송 왼쪽의 녹색 글자 지역만 통의방(通義坊)이다. 즉, 통의방 4통 2호, 통의방 4통 1호로 표시된 부분과 동척 부지 구역을 제외한 지적원도의 전 지역이 순화방이며, 이는 상편 1번의 〈도성대지도〉와 분명한 차이점이다.

〈도성대지도〉에 따르면 사재감이 있던 구역 위쪽(후동계)과 오른쪽 상단 지역(왕정동), 그리고 아래쪽의 창의궁 지역(연추문계)이 모두 의통방 관할이었으며, 이처럼 북쪽, 서쪽, 남쪽이 모두 의통방으로 둘러싸인 사재감 소재지 역시 의통방에 속하였을 확률이 높다. 〈도성대지도〉와 〈광무호적〉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의통방 왕정동계(王井洞契) 지역 → 순화방 사재감계(司宰監契) 왕정동(王井洞) 일대로 편입
의통방 후동계(後洞契) 지역 → 순화방 사재감계 대동(帶洞), 매동(梅洞) 일대로 편입
의통방 연추문계(延秋門契) 지역 → 의통방(통의방) 창의궁계(彰義宮契) 또는 사재감계

의통방의 관할 면적이 현저하게 축소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실제 사재감 청사의 이동이 없었을지 모른다. 즉, 지도에서 사재감 청사가 서향(西向)으로 표기된 것은 사재감 대문으로 향하는 골목 방향을 중점으로 그린 때문이고, 각종 문헌에 사재감 위치 변동이 기재된 것은 동일한 지점(사재감 청사 위치)의 행정구역이 의통방에서 순화방으로 조정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다.


1808년(순조8)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의 훈련도감(訓鍊都監) 수성자내(守城字內) 항목에 각 군영별 한성부 방어[守城] 구역이 설명되어 있는데, 그 문서에 등장하는 순화방, 의통방의 계 명칭은 아래와 같다.

순화방(順化坊) : 사재감계(司宰監契)
의통방(義通坊) : 왕정리계(王井里契), 후동계(後洞契), 연추문계(延秋門契)

1870년경 간행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의 수록 내용도 연추문계가 영추문계(迎秋門契)로 바뀐 것만 제외하면 동일하다. 정조 시기에는 순화방이 사재감일계(司宰監一契), 사재감이계(司宰監二契) 또는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로 되어 있기도 하다. 같은 시기 의통방 후동계(後洞契)는 왕정후동계(王井後洞契)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행정체계가 1895년(고종22) 윤5월에 한성부 행정구역 개편 후에 아래처럼 변화된다.

순화방(順化坊) :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통의방(通義坊) : 창의궁계(彰義宮契)

왕정리계, 후동계 지역이 순화방계 아래로 흡수되고, 의통방(통의방)의 3계 중에 연추문계의 후신인 창의궁계만 남은 것이다.


정조 연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1781년(정조13) 당시 팔도 전 지역의 호구가 매우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과 1906년 광무호적의 호적표 기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상평방(常平彷), 연희방(延禧坊), 연은방(延恩坊) 등 3개 방을 제외한, 북부(北部) 한양도성 성내(城內) 9개 방을 담았다.

방명(坊名) 1789년(정조13) 1906년(광무10) 증감(%) 비고
순화방(順化坊) 1,167호 (2계) 1,391호 (2계) +224호 (+19%)
안국방(安國坊) 229호 (1계) 177호 (1계) -52호 (-22%) 안동별궁 소재
가회방(嘉會坊) 252호 (1계) 354호 (1계) +102호 (+40%)
의통방(義通坊) 158호 (3계) 36호 (1계) -122호 (-77%)
관광방(觀光坊) 652호 (3계) 612호 (4계) -40호 (-6%) 종친부 소재
진장방(鎭長坊) 346호 (1계) 401호 (1계) +55호 (+16%)
양덕방(陽德坊) 124호 (1계) 165호 (1계) +41호 (+33%)
준수방(俊秀坊) 204호 (1계) 326호 (1계) +122호 (+60%)
광화방(廣化坊) 202호 (1계) 254호 (1계) +52호 (+25%)
합계 3,334호 (14계) 3,716호 (13계) +382호 (+11%)

성내(城內)


순화방 지역이 1789년 1,162호에서 1906년 1,391호로 100여 년 사이에 224호가 증가한 반면, 통방 지역은 122호가 감소하여 증감비가 -77%에 달하였다. 다른 대부분 지역이 한성부의 인구 증가에 맞물려 호구(戶口)가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각주:3] 한양도성 내 중심부의 거주 가능한 필지는 건물로 조밀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행정구역 변동 없이) 필지 합병 또는 분할만으로는 순화방과 의통방 지역에서 이러한 호수 증감이 일어나기 어렵다. 위 표에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동서남북의 4개 부(部)에 막혀있던 중부(中部)는 1789년 4,082호에서 1906년 3,972호로 큰 차이가 없었다. 한양도성 안쪽 지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벽 가까이 외곽으로 확장될 여유가 있었던 북부의 여러 방(坊)과 대비된다.

참고로, 1795년(정조19) 6월 당시 순화방 2계의 원호(元戶)는 1,127호(戶), 의통방 3계의 원호는 안국방(安國坊)의 안국동계(安國洞契)를 포함하여 583호 규모였다.[각주:4] 의통방의 3계(왕정리계, 후동계, 연추문)와 안국방 1계(안국동계)의 호수 합계 583호에서 안국동계 소속 약 230호를 제외하면 의통방 3계의 호수는 약 350호였던 것이 된다. 이 350호에는 1788년(정조12) 10월에 신설되었던 상평방(常平坊)의 원호가 일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서 상평방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실린『일성록(日省錄)』의 해당 기사에 숫자 오류가 여럿 있으므로 기록 자체의 신뢰성에 일부 의문이 있다.)


의통방의 창의궁계(연추문계) 자체도 영조, 정조, 순조 시기의 창의궁 기능 확장[각주:5]에 따라 주변 여러 민가(民家)가 점차 창의궁 부지로 편입[각주:6]되었기 때문에 일반 가옥은 1906년경에 불과 36호만 남았을 정도로 그 권역이 축소되었다.[각주:7] 순화방이 130통 1,391호였던 것과 비교하면, 4통 36호로 된 통의방은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1909년 12월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청원을 탁지부(度支部)에서 받아들여 통의방에 있던 창의궁(彰義宮) 부지 5,999평과 창의궁 북동쪽의 2개 필지(92평)를 매각 후 동척 사택 부지로 제공하였기 때문에 통의방 지역은 다시 줄어들었다.[각주:8]

위에 기술한 것처럼 의통방(통의동) 관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줄어들었지만, 의통방이 통의방(1894)으로 개칭된 후, 일제강점기 시기의 통의동(1914), 통의정(通義町, 1936)을 거쳐 현재는 행정동 사직동(社稷洞) 아래에 법정동인 통의동(1946)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순화방은 동명으로 남지 못했다.)

사재감계회도(司宰監契會圖)11번 이미지 - 사재감계회도(司宰監契會圖), 1605년


위 그림은 1605년에 제작된 〈사재감계회도(司宰監契會圖)〉이다. 1592년(선조25)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1597년 종결된 지 7년 정도가 지난 시점의 모습으로, 사재감 청사가 의통방에서 순화방으로 이전했다고 하면 9번 이미지의 ㉠ 위치일 것이므로 대문(大門)과 대청(大廳)이 서향이고, 만일 사재감 청사의 이전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 위치이므로 남향(南向)이다.

계회도의 모습과 상편 7번의 사재감 청사 실측 도면을 비교하면 중문(中門) 역할을 하는 내담(內墻)이 눈에 띈다. 그리고 대청의 평면도 다르고 기타 부속 건물들의 배치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대문 앞에도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있으므로, 이 계회도는 의통방 시절의 관청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북쪽에 작은 문이 있고 그 위로 다시 담이 있는 것을 보면 1605년에 그려진 이 그림을 볼 때 사재감 청사는 ㉡ 위치에 계속 있었을지 모른다는 놓지 않게 한다. 북문(北門)을 사재감 북쪽의 도로(현재의 자하문로 10길)로 통하는 문, 그 위의 담을 길 건너편 민가 일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문을 비롯한 주면 풍경은 계회도가 회화라는 점을 참작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내부 건물의 형태와 배치는 3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여러 차례 변화되었을 것이니까.

통의동(通義洞) 사재감(司宰監) 신문기사12번 이미지 - 통의동 사재감 (동아일보, 1924년 7월 19일)


위 이미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동아일보(東亞日報) 1924년 7월 19일자 기사의 일부분이다. 연재물 제목은 '내동리 명물(名物)', 당시 경성부(서울)의 여러 동내 명물을 소개하는 짧은 코너였으며, 1929년에 『경성백승(京城百勝)』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기사 오른쪽에 사재감 건물의 사진이 실려 있다. 기사가 작성된 1924년 당시에는 사재감에 있던 건물 대부분이 헐려 공터가 되었기 때문에(상편 6번의 1921년 경성지형도 참고), 그 이전에 촬영된 사진이었을 것이다. 대청 혹은 신당(부군당)으로 추정되나, 사재감의 어떤 건물인지는 기사에 표기되어 있지 않다.[각주:9]

기사 본문을 현대어로 윤색하여 옮겨 보면 아래와 같다.

通義洞 司宰監 (통의동 사재감)

◇ 사람이 사는 데 없어서 못쓸 요긴한 물건이 많습니다만 어렴시수(魚鹽柴水, 물고기와 소금, 장작, 물)가 제일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살 땅을 고르자면 첫째 이 네 가지가 좋으냐 언짢으냐 묻습니다. 물은 흔한 것이니까 고만두고, 여렴시같이 요긴한 물건은 또다시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 이 요긴할 물건을 궐내에 공궤하던 관청이 사재감입니다. 제일 존귀한 곳에 제일 요긴한 물건을 공궤하는 관청이니 관청중 제일가는 관청이 이 사재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의동 명물입니다.

◇ 사재감이 사재감 노릇을 못 하게 된 뒤에 잠깐 마대(馬隊, 마병 부대)가 들어섰고 또 오랫동안 공청으로 있었답니다. 지금은 되지 못한 채 하나만 남아있고 모두 빈 터전이 되었는데, 이 터전의 주인이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 하는 일인이랍니다. 애호박 덩굴지고 아주까리, 옥수숫대 우뚝우뚝 선 밭 모퉁이를 돌아서 늙은 회화나무 밑에를 가면 전에 부군당이 있던 터전이 있습니다. 이 부군당의 부군은 고려 공민왕이더랍니다. 이 부군이 영험이 있어서 부군당 물건을 훔쳐 가는 도적놈은 담에도 꼭 붙여놓더랍니다. 그 영검도 지금은 물을 곳이 없게 되고 회화나무 그늘이 동네 늙은이의 졸음터가 될 뿐입니다.


8번 〈경성지형도〉에서 살펴본 사재감 청사 내의 활엽수는 회화나무였다. 신당(부군당)에서 모시던 대상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이었고, 예전 사재감 청사 부지가 1924년 당시에는 고리대금업을 하던 일본인의 소유로 되어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마대(馬隊)는 말을 타고 전투를 수행하는 부대, 즉 기병대(騎兵隊를 가리킨다. 단, 사재감 터에 있었던 마대는 기병 전투부대가 아니고 말이 끄는 수레 중심의 보급부대인 치중마병대(輜重馬兵隊)였다.

사재감 관청 폐지 이후의 사재감 청사 터 변동 내역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882년(고종19) 12월 29일 - 사재감 폐지
1896년(건양01) 06월 08일 - 친위대(親衛隊) 치중마병대 창설 (100명 규모)
1900년(광무04) 12월 29일 - 치중마병대 해체 (치중병 1개 중대 설치)
1904년(광무08) 02월 23일 - 일본군 치중병마(輜重兵馬) 부대가 북장동 마병대영으로 이전
1908년(융희02) 11월 00일 - 사재감 청사 터의 관리 관청 변경 (군부에서 탁지부로)

사재감 기능이 폐지되면서 그 터는 공터가 되었는데, 1896년에 치중마병대가 창설되어 위 신문기사 본문에 언급된 것처럼 잠시 마대영(馬隊營)으로 사용되었다. 10번 지도의 설명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마병영내동(馬兵營內洞)' 명칭이 1906년 호적표에 남아 있었다.

상편의 7번 실측 도면에 등장하는 대청 동쪽의 마구간 5칸 반과 주접실 남쪽의 마구간 4칸은 사재감이 마대영으로 전용되었던 실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사재감이 본래 궐내에 물고기, 소금, 장작 등을 공급하는 관청이었으나, 그러한 업무를 행정적으로 담당한 관청일 뿐이므로 대청 바로 옆에 마구간을 둬야 할 정도로 본청 차원에서 많은 말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1904년에 일본군 치중병마 부대가 북장동(北壯洞) 마병대영으로 옮겨갔다. 상편 3번의 〈한국경성전도〉에서는 상편 5번의 〈경성부관내지도〉에서 파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지점에 '北壯洞(북장동)'이라는 표기가 있다. 그러나 1904년의 북장동 마병대영은 사재감 터에 있던 대한제국 친위대의 마병대영을 가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10번 지적원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재감 일대도 흔히 북장동이라 하였고, 치중대(보급부대)이기는 하지만 실제 마병대가 사재감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사재감(司宰監) 지적도 필지 변천13번 지도 - 사재감(司宰監) 인근 지적도 필지(筆地) 변천


위 지도는 시기별 지적도이다. A 지도는 1912년 〈경성부지적원도〉에 1908년 사재감 실측 도면을 겹친 것이고, B 지도는 1912년 시점의 필지별 지번(地番), C 지도는 1929년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京城府壹筆每地形明細圖)〉의 사재감 터 부분, D 지도는 현대 지도상의 지번 번호이다.

사재감 터는 통의동 91번지였는데, A 지도와 B 지도를 살펴보면 사재감 대문 오른쪽으로 작은 부분도 통의동 91번지에 편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새자감 부지(대형 91번지)와 대문 우측의 작은 필지(소형 91번지)를 합쳐서 790평 규모였다. 10번의 지적원도 이미지와 비교하면, 통의동 83번지는 조선시대(대한제국) 통호 번호로 순화방 사재감계 71통 1호, 93번지는 70통 7호, 95번지는 70통 5호, 103번지는 69통 9호, 106번지는 63통 10호, 129번지는 66통 2호, 130번지는 66통 7호였다.

이 사재감 부지(통의동 91번지)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 중후반에 C 지도처럼 여러 필지로 분할되어 여러 채의 도시한옥(개량한옥, 연립한옥)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다시 필지가 합병되고 분할되어 D 지도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D 지도에서 파란색으로 기재한 숫자가 예전의 사재감 터 지번이다. (예 : 33은 종로구 통의동 91-33번지를 뜻함)

사재감(司宰監) 지적도 (1929년)13번 지도 - 사재감(司宰監) 필지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년)


위 지도는 앞의 12번 지도 C번 지적도를 확대한 것이다. 국유지에서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소유로 넘어간 통의동 91번지 사재감 청사 부지가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2개 골목으로 나뉜, 91-1번지부터 91-16번지까지의 16개 필지로 분할된 상황이다. 사재감 대청은 91-9, 신당은 91-12, 주접실 건물은 91-15, 대문은 91-6번지에 속하였다. 모든 건물이 헐려 공터가 된 지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상황이었지만.

사재감(司宰監) 청사 평면도15번 지도 - 사재감(司宰監) 청사 평면도 : 현대 지도


위 지도는 현대 지도에 사재감 청사 도면을 중첩한 것이다. 사재감 대청(大廳)은 ㉠ 건물과 ㉡ 건물 사이에, 신당인 부군당(府君堂)은 ㉢ 건물 바로 앞의 자하문로 10길 위에, 외대문(外大門)은 ㉣ 건물 바로 왼쪽에 있었다. 북문, 내담은 사재감 청사 위치가 이전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사재감계회도〉를 토대로 위치를 추정한 것이다.

사재감 터 표지석이나 안내판을 설치한다면, 자하문로 10길 도로에 면한 ㉠ 또는 ㉢ 건물의 북쪽 인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안내판에 사재감 평면도도 같이 넣으면 좋을 것 같다.



※ 사재감 청사의 정확한 위치 고증은 상편에 수록한 7번 사재감 청사 실측 도면이 학계에 공개되었을 때부터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도면이 공개된 때가 빠르면 2005년이지만, 그동안 사재감 청사를 통의동 91번지로 특정하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사재감 청사가 지명도 낮은 3급 관청이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사재감 청사의 위치 이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그리고 사재감 터의 변천과 여러 시기별 지도에 등장하는 주변 지역에 대한 내용을 짧게나마 풀어본 것에서 본 글의 작성 의미를 찾아봅니다.

※ 사재감 청사 위치는 필자가 처음 밝혀낸 것이 아닙니다. 녹색창에서 '사재감 통의동 91번지'로 검색해 보면 어느 카페의 게시물 제목으로 '궐외각사의 하나인 사재감 자리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 91번지'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단 본문 내용이 제목과 전혀 상관없고, 게시물이 올려진 카페도 뜬금없는 곳이기에, 그리고 계정의 아이디도 자동생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마도 광고용 계정이 어떤 프로그래밍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등록한 게시물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필시 어떤 책이나 문서, 게시물에서 제목 내용을 가져와 올릴 것일 테니, 게시물이 등록된 2014년 3월 이전에 이미 사재감 청사 위치가 누군가에 의해 고증되었던 것 같습니다. (논문, 발굴조사보고서, 학계 문헌 등에서는 현재까지 사재감 위치를 통의동 91번지로 지목한 부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시는 분 계시면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 상편과 본 하편의 문체가 많이 다릅니다. 어떤 것이 편하신지 모르겠네요. 5천 만이 넘는 대한민국 인구 가운데 조선시대 관아 건축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 100명이나 될까 싶은데, 그래서 그런지 글에 피드백이 거의 없어서 어떤 식으로 글을 올리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혼자만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누구나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또 최근 글에서 주석을 기재하다 보니 글이 점차 논문 분위기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가능하면 가벼운 형식으로, 간결한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시원하게 보내세요~



  1. 오늘날 단어로는 침엽수(針葉樹) [본문으로]
  2. 오늘날 단어로는 활엽수(闊葉樹) [본문으로]
  3. 고종 연간에 본격 건립된 안동별궁(安洞別宮)이 있었던 안국방, 역시 고종 연간에 기능과 규모가 확장된 종친부(宗親府), 의정부(議政府)가 있었던 관광방 정도만 일반 가옥의 수가 감소하였다. 별궁, 관청과 일부 세도(勢道) 가문이 부지를 확장하면서 인근 민가의 가대(家垈, 집터)를 흡수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일성록(日省錄)』, 정조19년 을묘(1795) 6월 17일(병신) 기사 [본문으로]
  5. 창의궁 경내에 1729년(영조5) 효장세자(孝章世子) 사당인 효장묘(孝章廟) 건립, 1752년(영조28) 효장묘 동쪽에 의소세손(懿昭世孫) 사당인 의소묘(懿昭廟) 건립, 영조 연간의 장보각(藏寶閣) 건립, 1776년(정조즉위년) 의소묘의 효장묘 자리 이전. 1830년(순조30) 예전 의소묘 자리에 효명세자(孝明世子) 문호묘(文祜廟) 건립 등이 있었다. [본문으로]
  6. 영조 임금의 잠저였던 창의궁의 주소는 (상편의 각주에서 살펴본 것처럼) 의통방 연추문계 7통(統) 5호(戶)였다. 각 통은 10호로 구성되는 것이 기본이었으므로, 창의궁 권역에 1통부터 7통까지만 있었다고 해도 영조 초기에는 이곳에만 60~70호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06년경에는 통의방(의통방)에 1통부터 4통까지만 존재했고, 특히 창의궁동(彰義宮洞) 지역의 2통은 1호부터 7호까지가 결락되어 겨우 3호만 남아 있었다. [본문으로]
  7. 통의방 전체 36호 중에 창의궁계(彰義宮契), 창궁계(彰宮契), 창의계(彰義契), 창의동(彰義洞), 창의궁동(彰義宮洞) 기재는 9호에 불과하다. 나머지 26호는 사재감계(司宰監契),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사재감하계(司宰監下契), 하패계(下牌契)이며, 1호는 호적표에 매동계(梅洞契)로 적었다. [본문으로]
  8.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 부지는 1912년에 6,381평(5,999+92+290)으로 확장된다. (위 10번 이미지 참고) [본문으로]
  9. 189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 사재감 일대를 촬영한 사진이 몇 장 전해지고 있으나 원거리에서 경복궁 서촌 일대 조망하여 앞뒤로 찍은 것이기에 사재감 청사의 구조나 건물 형태를 식별하는데에는 한계가 뚜렸하다. [본문으로]
관청, 대한제국, 사재감, 서촌, 순화방, 의통방, 지적도, 통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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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서편, 서촌(西村)에 있던 관청 사재감(司宰監) 터 - 상편

※ 마지막 글을 올린 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매월 하나씩의 게시물을 올리고자 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래 올리려던 글이 있었는데, 자료 수집과 이미지 작업, 집필 등에 계속 시간이 투입되다 보니.. 어느덧 소논문 수준으로 방대(?)해졌기에 조금 더 간결하게 다듬고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일피일하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고요. 일단 이번 글은 예비로 준비하던 사재감 이야기로 대체합니다. 이 글도 짧게 쓰려고 했지만, 이것저것 덧붙이다 보니 이미지 숫자가 원래 글의 절반을 넘었네요. (이번에는 문체를 부드럽게 써 보겠습니다.)



경복궁(景福宮) 서쪽에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뜨고 있는 마을, 서촌(西村)이 있습니다. 인왕산(仁王山)과 경복궁 사이 지역을 모두 서촌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옛날 조선시대의 서촌(경복궁 서쪽의 마을)을 말하는 것에 가깝고, 오늘날 '핫 플레이스(Hot place)'로서의 서촌은 경복궁의 서쪽 담장(궁장)에 바로 붙어 있는 마을 가운데 예전의 정취를 아직 간직하고 있는 효자동(孝子洞), 창성동(昌成洞), 통의동(通義洞) 일대를 주로 지칭합니다. 특히 골목길과 한옥이 아기자기하게 남아 있는 통의동이 대표 지역이죠.

이 '서촌'의 중심지와 같은 동네 통의동에 사재감(司宰監)이라는 조선시대 관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학, 건축학 관련 논문, 발굴조사보고서 등에서 사재감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는 내용을 보지 못했습니다. 표지석 또한 설치되어 있지 않으므로, 현재 학계에서는 사재감의 위치를 대략 경복궁 영추문 옆의 옛날 매동초등학교 소재지[각주:1]에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사재감 청사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서촌(西村) 지역1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도성대지도, 1750년대)


위 1번 지도는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제작 시기를 적어 보면 영조(英祖) 임금 집권 후반기가 시작되는 1750년대 즈음입니다.

사재감 관청이 왼쪽 방향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관청 주요 건물 또는 대문의 방향이 서향(西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재감의 소재 지역은 의통방(義通防)이며, 동 이름으로는 대동(帶洞, 띠골)과 매화동(梅花洞) 사이입니다. 매화동은 매동(梅洞)이고, 사재감전로(司宰監前路, 사재감 앞길)라는 명칭 몇몇 문헌에 등장하므로 그렇게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대동 위에 의통방 후동계(後洞契), 소대동(小帶洞, 작은 대동), 순화방(順化坊), 서금교(西錦橋), 매화동 오른쪽으로 의통방 연추문계(延秋門契), 사재감 서쪽으로 준수방(俊秀坊), 준수방 준수방계(俊秀坊契), 지도 왼쪽 하단에 체부청동(體府廳洞) 지명이 보입니다. 연추문계는 경복궁 서문의 공식 명칭을 따라서 영추문계(迎秋門契)라고도 하였으며, 체부청동은 체찰사부(體察使府)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지명입니다.


조선시대 80여 개 중앙 행정관청 가운데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의금부(義禁府) 등이 널리 알려진 1급 관청이라면, 그보다 장관(長官, 기관장)의 직급이 낮지만 사람들이 교육, 역사극, 역사소설 등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을 만한 관청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 교서관(校書館), 사역원(司譯院), 훈련원(訓鍊院) 등을 2급 관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급 관청은 이름도 생소한 나머지 50~60개 관청이며, 사재감도 이러한 3급 관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재감은 호조(戶曹)의 속아문(屬衙門), 즉 호조의 소속 관청으로 궁궐에 어육(魚肉), 소금[鹽], 장작[燒木], 횃불[炬火] 등을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본래 정3품 당하관인 사재감정(司宰監正)이 수장인 정3품 아문(衙門)이었으나, 후대(아마도 영조 임금 초기)에 종4품 첨정(僉正)으로 장관의 직급이 낮아졌습니다(종4품 아문).

청구요람(靑丘要覽) 도성전도(都城全圖) 서촌(西村) 지역2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청구요람 도성전도, 1848년경)


위 2번 지도는 1번 지도와 같은 지역을 보여주는 1848년경 제작된 지도 〈청구요람(靑丘要覽)〉 도성전도(都城全圖)의 일부분입니다.

사재감 관청이 남쪽을 향한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번 지도는 서향이었으나, 2번 지도에서는 남향인 것입니다.

사재감에 관한 문헌 중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 〈경도하(京都下)〉에는 '사재감. 북부 의통방에 있다.'[각주:2]라고 되어 있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권1. 〈경도(京都)〉 항목에는 '처음에는 의통방에 있었는데 뒤에 순화방으로 옮겼다.'[각주:3]라고 적혀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84년(성종15)에 완성되었던『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보완하여 1530년(중종25)에 증보한 것이고, 『동국여지비고』는 이를 다시 보충하여 19세기, 즉 고종 초기인 1870년경에 저자 미상으로 간행된 책입니다.

1830년(순조30)에 간행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사재감의 위치를 기존 의통방(義通防)이 아닌 순화방(順化坊)으로 적고[각주:4] 있기 때문에 그보다 뒤에 간행된『동국여지비고』에 사재감 청사 항목이 그와 같이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사재감 청사가 매우 짧은 거리나마 의통방에서 순화방으로 이전하면서 청사 건물의 방향도 서향에서 남향으로 변경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 자료를 살펴본 결과, 순화방으로의 청사 이전 시기는 대략 정조(正祖) 임금의 치세 후반기인 1790년대로 추정됩니다. (실제 청사를 이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도상의 그림 형태 차이 또는 의통방과 순화방의 행정구역 조정에 따른 차이에 불과한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재감 아래쪽으로 매화동(梅花洞, 매동), 창의궁(彰義宮), 금청교(禁淸橋), 체부청동, 위쪽으로 대동(帶洞), 준수방, 왕정동(王正洞) 지명이 보입니다.

창의궁은 영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의 일부이고[각주:5], 금청교는 경복궁 서편을 흐르던 백운동천(白雲洞川)에 놓여 있던 돌다리입니다. 줄여서 금교(禁橋)라고도 하였습니다. 위 지도에서는 금청교 첫 글자 '금(禁)'만 보이므로 실제 다리 위치는 더 아래쪽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28년 6월에 백운동천 복개 공사로 인해 해체됩니다.

한국경성전도(韓國京城全圖) 서촌(西村) 지역3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한국경성전도, 1903년)


위 3번 지도는 경부철도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社)에서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광무7)에 발행한 〈한국경성전도(韓國京城全圖)〉의 일부분입니다. 경부철도주식회사는 일본인들이 이권 확보를 위해 세운 회사이며, 지도 발행도 회사 소재지인 일본 동경(東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재감내(司宰監內)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풀어서 '사재감 안쪽 동네' 정도가 되므로, 이 위치에 사재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빨간 화살표로 표시한 엎어진 ㄱ자 형태의 건물에 주의합니다.


사재감내 위쪽으로 대동(帶洞), 포정동(匏井洞), 왕정동(旺井洞)이, 아래쪽으로 매동(梅洞, 매화동), 영추문전(迎秋門前), 영추문, 서문후동(西門后洞, 西門後洞)이 있습니다. 아래 다리는 헌교(憲橋)이며, 지도 왼쪽으로 통동(通洞), 사포동(司圃洞), 누각동(樓閣洞) 등이 순화방이라는 큰 글자 아래에 흩어져 있습니다. 최소한 이 지도에서는 통의방(通義坊)[각주:6] 표기가 없고, 이 일대가 모두 순화방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인왕산(仁王山)을 인왕산(仁旺山)이라고 고쳐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문헌을 고증한 결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도 (仁王山 표기가 다수였기는 하지만) '仁王山'과 '仁旺山'이 혼재되어 사용되었습니다. 2번 지도의 왕정동(王正洞)과 위 3번 지도의 왕정동(旺井洞) 표기 차이도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 서촌(西村) 지역4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경성부시가도, 1911년)


위 4번 지도는 일제강점시 시기인 1911년[각주:7]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의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에서 인쇄한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의 서촌 일대입니다. 3번 지도의 빨간 화살표 부분은 동일하게 표시하였습니다. 그 아래에 사재감전동(司宰監前洞)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사재감 앞 동네'가 됩니다. 따라서 사재감은 (이 지도에 따르면) 사재감전동으로 표기된 지점의 북쪽 또는 동쪽에 있었던 것이 됩니다.


사재감전동과 같은 구획에 매동, 대동의 동명이 있고 영추문 가까운 방향에 매동학교(梅洞學校)가 있습니다.[각주:8] 매동학교는 1895년(고종32)년 8월에 장동관립소학교(壯洞官立小學校)로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4개 소학교[각주:9] 중의 하나입니다. 같은 해 9월에 장동관립소학교가 매동(梅洞)의 예전 관상감(觀象監) 부지(㉠ 위치)로 이전하면서 매동관립소학교(관립매동소학교)로 개칭되었고[각주:10], 1900년 12월에 중추원(中樞院)이 매동소학교로 이설(移設)되면서 매동소학교는 대루원 바로 위쪽의 통례원(通禮院) 직방(直房)[각주:11]으로(㉡ 위치) 이사하였습니다. 이후 관립매동보통학교(1906)로 변경되었으며, 앞에서 각주로 기술한 것처럼 1933년에 필운동으로 신축 이전한 후, 매동공립심상소학교(1938), 매동공립국민학교(1941), 매동초등학교(1996)로 재차 교명이 변경되었습니다.

매동 위쪽에는 범씨궁동(范氏宮洞), 경찰관연습소(警察官練習所), 왕정동, 창성동(昌城洞)이, 아래쪽에는 서문후동,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사택(社宅), 창의궁이 있고, 사재감전동 서쪽으로 장동(壯洞), 헌교, 반정동(半井洞), 사포동, 누각동, 체부동(體府洞) 등이 지명이 보입니다.

범씨궁동은 범씨궁(范氏宮), 범숙의궁(范淑儀宮)이라고도 하며, 철종(哲宗) 임금의 후궁인 숙의(淑儀) 범씨(范氏)가 살던 곳입니다.[각주:12]

경찰관연습소는 위 지도를 발행한 경무총감부 산하의 경관연습소(警官練習所)이며, 1909년(융희3) 5월에 이곳 부지[각주:13]에 자리를 잡았다가 1917년 11월 5일에 광화문 앞의 조선시대 이조(吏曹) 및 한성부(漢城府) 터로 옮겨갑니다. 창의궁과 그 주변 6천여 평의 가옥을 1909년경에 매각한 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에 대하(貸下, 임대)한 자리한 들어선 대규모의 동척(東拓) 사택도 눈에 띕니다.


앞서 수록한 4개 지도에서 살펴본 지역이 서울 시내의 어느 부분인지 감이 잘 안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넓은 지역을 조망한 지도를 올려봅니다.

경성부관내지도(京城府管內地圖), 서촌(西村) 지역5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경성부관내지도, 1918년)


위 5번 지도는 1918년 1월에 발행된 〈경성부관내지도(京城府管內地圖)〉입니다. 경복궁 서쪽 지역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광화문(光化門) 위치를 확인하면 빨간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어느 곳인지 손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지명은 앞의 4번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追門)의 위치가 실제와 다르게 상당히 아래쪽에 표시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색 화살표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시 시기에 만들어진 대부분 지도에 표기된 영추문의 위치이고, 녹색 화살표는 현재 영추문(1926년 철거, 1975년 복원)의 위치입니다.

1917년 11월에 광화문 앞 경기도청(京畿道廳) 남쪽 지역으로 이전해 간 창성동 경관연습소가 여전히 지도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같은 해 12월 혹은 이듬해 1월 시점에도 이전 작업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지도 북쪽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가 보입니다. 고종 황제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가 하사한 부지[각주:14]에 1906년(광무10) 4월 개교한 진명학교(進明學校)의 후신으로, 지도가 제작된 시점에는 4년제의 진명여자보통학교, 3년제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는 1989년 8월에 양청구 목둥(木洞)으로 신축 이전합니다.

지도 서쪽에 배화학교(培花學校)가 보입니다.[각주:15] 위 지도 아래쪽에 있는 내자동(內資洞)에서 1898년(광무2) 10월에 설립된 배화학당(培花學堂)[각주:16]이 1913년에 누하동(樓下洞)으로 이전하였으며, 현재는 배화여자대학교(培花女子大學校), 배화여자고등학교(培花女子高等學校), 배화여자중학교(培花女子中學校) 등의 교육기관이 밀집해 있습니다.


지도 명칭 부분의 파란색 화살표는 하편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경성지형도(京城地形圖), 서촌(西村) 지역6번 지도 - 서촌 일부 지도 (경성지형도, 1921년)


위 6번 지도는 1921년에 측량하고 1922년 7월에 일제(日帝) 참모본부(參謀本部)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인쇄한 〈경성지형도(京城地形圖)〉의 일부분입니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에 공터 부지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앞의 지도와 대부분 비슷한데, 기존 경관연습소 부지에 체신리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 체신이원양성소)가 들어서 있는 것이 크게 차이 나는 점입니다. 조선총독부 체신국(遞信局)에서 체신 사업에 관계되는 각급 종사원을 양성하기 위해 1918년 1월 12일에 체신리원양성소를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5월(4월?)에 경관연습소 부지를 인수하여 사용하다가 1936년 12월에 용산 지역으로 옮겨갔습니다. 이후 1946년 9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府) 요인들이 주축이 되어 개교[각주:17]한 국민대학교(國民大學校)가 1947년부터 교사(敎舍)로 사용하였고, 국민대가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전한 1971년 9월 이후에는 문화재관리국, 정부기록보존소 등의 정부 기관이 들어섰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 바로 위에 백송(白松) 표기가 보입니다.[각주:18] 1962년 12월 3일에 천연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던 흰색을 띠는 소나무, 즉 통의동 백송이 있던 곳입니다. 수령(樹齡)이 600년 혹은 300년이라고 하는데, 1990년에 7월 17일에 돌풍으로 쓰려져 수명을 다하였고 1993년 3월 24일에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되었습니다.

북서사재감(北署司宰監) 실측 도면7번 도면 - 사재감(司宰監) 청사 실측 도면 (1908년 5월)


위 7번 도면은 1908년(융희2) 5월 31일에 측량된 〈북서사재감(北署司宰監)〉 실측 도면입니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반인들이 황실 또는 국가(관청) 소유의 건물을 빌려 쓰기 위해 제출한 청원 관계 문서인『가사불허차에 관한 문서 3호(家舍不許借에關한文書三号)』에 첨부된 도면으로, 다른 가사불허차(家舍不許借), 토지불허차(土地不許借) 도면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정밀하게 실측되었습니다. 축적은 200분의 1. (1:200)

북서는 1895년(고종22) 윤5월에 한성부의 북부(北部)를 개칭한 것이고, 도면 오른쪽의 비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면적[總積] : 800.97평(坪)
건물(建物) : 33칸반[韓製間計]
갑(甲) : 3칸, 신당(神堂)
을(乙) : 10칸, 대청(大廳)
병(丙) : 5칸반, 마구간[馬廐]
정(丁) : 8칸, 주접실(住接室)?
무(戊) : 4칸, 마구간[馬廐]
기(己) : 2칸, 대문(大門)

건물 항목의 '한제간계(韓製間計)'는 '한국식 건물(한옥)의 칸[間] 합계(계산)' 라는 뜻입니다. 갑(甲) 건물 신당은 조선시대 관청마다 있었던 부군당(府君堂)이며, 을(乙) 건물 대청은 사재감의 기관장이 근무하는 본청(本廳)입니다. 정(丁) 건물 주접실(住接室)은 생소한 단어라서 용도가 불분명합니다. 주접(住接)은 '임시 거주지'인데, 한자 '주(住)'의 식별이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하급 관원이나 서리의 근무 공간이었으나 사재감 폐지 이후에 다른 용도로 활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3번 지도에서 언급한 빨간 화살표의 엎어진 ㄱ자 건물 모양과 위 도면의 대청(甲) + 마구간(丙) 결합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재감 부지의 전체적인 모양이 6번 〈경성지형도〉에서 역시 빨간 화살표로 표시한 공터 부지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면의 측적도 들어맞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재감 청사의 위치는 6번 그림의 지도에서 화살표로 표시한 지점이 됩니다. 지번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91번지입니다. (짝짝짝)


※ 사재감 청사 위치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본 글의 결론은 이미 나온 것과 같습니다. 다음 하편에서는 사재감 터의 변천에 관한 내용을 중점으로 할 예정입니다. 하편 열람하기 (링크)

  1.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7번지, 통의동 매동초등학교 (1933년 1월 19일에 종로구 필운동 32번지로 신축 이전) [본문으로]
  2. 在北部義通房(재북부의통방) [본문으로]
  3. 初在義通坊後移順化坊(초재의통방후이순화방) [본문으로]
  4. 司宰監在北部順化坊(사재감재북부순화방) [본문으로]
  5. 1714년(숙종40)년 작성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즉위 전 군호)의 준호구(准戶口, 호적등본)에 기록된 주소 :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의통방(義通坊) 연추문계(延秋門契) 7통(統) 5호(戶) [본문으로]
  6. 1894년(고종31)에 의통방(義通坊)이 통의방(通義坊)으로 개칭됨 [본문으로]
  7. 측량은 명치13년도(1910년)에 실시됨 (경성부시가도 범례 비고 부분 기록) [본문으로]
  8.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7-4 일대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7길 6-1 인근) [본문으로]
  9. 장동(壯洞), 정동(貞洞), 묘동(廟洞), 계동(桂洞) 네 곳에 소학교를 설치함 [본문으로]
  10. 11월에 매동의 예전 대루원(待漏院)으로 이전하였다고 함 (매동초등학교 역사 기록) [본문으로]
  11. 금부(禁府, 의금부) 직방(直房)이었다고도 함 (매동초등학교 역사 기록) [본문으로]
  12.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자하동(紫霞洞) [본문으로]
  13.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117-6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39) [본문으로]
  14.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67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57) [본문으로]
  15.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149 일대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1길 34 인근) [본문으로]
  16. 설립 당시 명칭은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 [본문으로]
  17. 국민대학관(國民大學館) 설립인가는 1946년 12월 18일, 재단법인 및 대학 인가는 1948년 8월 10일. [본문으로]
  18.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35-15 (건물이 아니므로 도로명주소 없음) [본문으로]
고지도, 관청, 사재감, 서촌, 순화방, 의통방, 조선시대, 통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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