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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징상 평양대 시기 경기감영 선화당(宣化堂) 건물

조선시대 각 도(道)의 행정, 사법을 책임지던 관청이 감영(監營)이다. 감영은 오늘날의 도청(道廳)이라 할 수 있고, 감영의 수장(首長, 長官)[각주:1]이 바로 관찰사(觀察使)였다. 관찰사의 품계는 종2품으로 현재의 차관급에 해당하며[각주:2],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 권한까지 관찰사가 가지고 있었다.

감영의 정청(政廳)을 선화당(宣化堂)이라 하였는데, 이 명칭은 팔도(八道)의 모든 감영이 동일했다. 경기도의 행정을 맡고 있던 경기감영(京畿監營)의 선화당 건물에 관해서는 2018년 7월에 올린 '조선왕조-구한말-대한제국 시기 한성부 관청 편액(현판) 이야기' 문서에서 짧게나마 한 번 다룬 바 있다. 이번 글은 그 선화당 건물의 1902년경 모습에 관한 짧은 이야기이다.


경기감영 선화당 건물 (징상 평양대 시기)1번 사진 - 경기감영 선화당 (징상 평양대 사진)


위 사진은 대한제국 주재 이탈리아 영사를 지낸 카를로 로세티(Carlo Rossetti, 魯士德, 1876-1948)가 1904년(1부)과 1905년(2부)에 간행한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 한국 그리고 한국 사람들)』에 실린 것이다. 사진에는 '한국 장군과 장교'라고 설명되어 있다.[각주:3]

사진의 배경 건물은 경기감영 선화당이며, 사진에 등장하는 군인은 징상평양대(徵上平壤隊) 간부들이다. 징상평양대의 '징상(徵上)'은 '서울로 불러서 올린 것'을 의미하고, '평양대(平壤隊)'는 평양 지역에 주둔하던 지방군인 진위대(鎭衛隊)이다. 당시 고종 황제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평양 진위대 병력을 교대로 상경케 해서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는데, 기록에 따라 징상대(徵上隊), 평양대(平壤隊), 징상진위대(徵上鎭衛隊)라고도 했다.


건물 기단(월대)에 마련된 돌계단 3개를 보면 건물 왼쪽에서 4번째 칸[間]이 건물의 중심 대청(大廳)임을 알 수 있다. 각 화살표 설명은 아래와 같다.

1) 진홍색 화살표 : '한성부 관청 편액 이야기 (클릭)' 문서에서 확인했던 용마루의 얼룩이 보이지 않는다. (아래 2번 사진과 비교)

2) 파란색 화살표 : 경기감영이 징상평양대 주둔을 위한 군영(軍營, 營門)으로 개조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감영 외행랑(外行廊), 내부 부속 건물 등이 2층의 군인 숙소로 개조되었다.

3) 보라색 화살표 : 제일 왼쪽에 있던 돌계단이 화살표 위치로 이축되면서 건물의 중심이 한 칸 오른쪽으로 이동되었다. (아래 2번 사진과 비교)

4) 주황색 화살표 : 화살표 끝부분에 글자 비슷한 것이 보인다. 그중 한 글자는 '隊(대)'처럼 보인다.

경기감영 선화당 (한성부 청사 시기)2번 사진 - 경기감영 선화당 (한성부 청사 사진)


위 사진은 이전 글에서 살펴봤던 것이다. 1번 사진과 비교를 위해 다시 올려본다.

기단부 돌계단 3개가 원래 자리에 있고, 편액(현판) 위치를 봐도 왼쪽부터 3번째 칸이 건물 중심임을 알 수 있다. 각 화살표 설명은 아래와 같다.

1) 진홍색 화살표 : 용마루 얼룩이 보인다. 1번 사진이 이 사진보다 뒤에 촬영된 것일 텐데, 1번 사진에서 얼룩이 안 보인 것은 조명, 노출 등의 촬영 조건에 따른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2) 녹색 화살표 : 건물 기단에서 내삼문(內三門)으로 이어지는 길에 바닥돌이 있고, 그 바닥돌 삼도(三道) 바로 옆에 가석(嘉石)[각주:4]이 세워져 있다. 1번 사진에서 바닥돌이 제거되어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돌계단 위치가 바뀌면서 바닥돌을 그대로 둘 수 없었을 것이고(=가석과 겹쳐짐), 행정 관청이 아닌 군영으로 건물 용도가 개편되면서 바닥돌이 있을 필요성도 감소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노란색 화살표 : 건물 오른쪽의 1칸만 온돌방 형태의 외형을 보인다. 반면 1번 사진에서는 7번부터 이러한 형태를 보인다. 대청에 설치된 분합문(分閤門)[각주:5]을 모두 개방 시켜 열어 놓은 상태에 따른 차이일 수 있다. 그러나 위 사진에 고창(高窓)[각주:6] 또는 교창(交窓)[각주:7]으로 보이는 부분(화살표 끝 지점)이 있고, 바닥 부분의 높이도 약간 다르기 때문에 어떻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고창은 아래쪽의 문이나 창문과 목재로 분리되어 있기에 분합문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는 다른 칸처럼 보일 수 없다. 위 사진에서는 8번의 1칸만, 1번 사진에서는 7번과 8번의 2칸이 대청(마루) 아닌 방 구조일 가능성이 높다.[각주:8]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선화당(宣化堂)3번 이미지 -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선화당(宣化堂) 건물의 변화


위 이미지는 1번 사진, 2번 사진을 기반으로 19세기에 제작된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의 선화당 부분을 편집한 것이다.

왼쪽이 2번 사진(한성부 입주), 오른쪽이 1번 사진(진상평양대 주둔) 상태를 보여준다. 변경된 점은 아래와 같다.

1) 빨간색 화살표 및 초록색 화살표 : 돌계단이 이동되면서 건물의 중심이 3번 칸에서 4번 칸으로 옮겨졌다. 이후 1914년에 고양군청(高陽郡廳)이 경기감영 선화당 건물에 들어섰을 때도 (그 사이에 돌계단이 2개로 축소되고 건물 외형에 변형이 있었으나) 4번 칸이 중심이었다.

2) 건물 전면 마당의 바닥돌(디딤석)이 철거되었다.


하나 남는 의문점은 사진 촬영 시기에 관한 것이다. 2번 사진의 촬영 시기가 1번 사진보다 빠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이유는 〈경기감영도〉에서 보이는 돌계단의 위치 이동, 바닥돌의 철거 때문이다. 옮기고 철거했다가 다시 옮기고 깔았다고 추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2번 사진에서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은 촬영 추정 시점을 역행한다. 〈경기감영도〉 선화당 그림에는 1번 사진처럼 7번과 8번 칸이 방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1) 2번 사진 촬영 후 1번 사진 촬영 : 돌계단 위치 변경, 바닥돌 철거가 자연스러움 (7번 칸 용도 문제 발생)

2) 1번 사진 촬영 후 2번 사진 촬영 : 7번 칸이 대청으로 개조되었다고 이해 가능함 (돌계단 원위치 및 바닥돌 재설치 문제 발생)

2번 사진의 촬영 시점에 대한 의문은 '한성부 관청 편액 이야기 (클릭)' 문서에서 이마 제기한 바 있다. 1902년 5월경 진행되었던 당시 한성부(漢城府) 청사의 대대적인 정비와도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경기감영 자리에 들어섰던 한성부 청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 공간을 같이 점유했던 징상 평양진위대.[각주:9] 그 시기를 전후로 한 한성부 청사의 잦은 이전 시도와 감영 및 선화당 구역의 외형 변화. 그 관계를 보여주는 두 장의 사진. 전문가에 의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1. 조선시대에는 주로 행수관(行首官), 행수장무관(行首掌務官) 등으로 호칭. [본문으로]
  2. 중앙 관청의 장관인 판서(判書)는 정2품, 그 아래 차관급인 참판(參判)이 종2품이다. 선거로 뽑은 현재의 광역지방자치단체장(도지사)도 차관급 예우를 받고 있다. 한성부 판윤이 정2품으로 장관급, 현재의 서울특별시장도 도지사보다는 한 등급 높은 장관급 예우이다. 즉, 조선시대와 현재의 주요 관직 등급이 비슷하다. [본문으로]
  3. 서울학연구소 번역, 숲과 나무, 1996년 초판 1쇄 271면. (이탈리아어 원서 미확인) [본문으로]
  4. 가석(嘉石)은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도록 하는 돌이다. 형조, 한성부, 감영 등의 관아에 두었다. [본문으로]
  5. 분합문(分閤門)은 접거나 펼 수 있는 문이다. 보통 상태에서는 창호지문 형태의 얇은 벽이 되고, 모두 접어서 위로 고정하면 공간이 개방된다. [본문으로]
  6. 창문 위에 낸 작은 창 [본문으로]
  7. 분합문 위에 낸 채광창 [본문으로]
  8. 분합문은 통상 대청 또는 대청과 방 사이에 설치한다. 전면에 분합문으로 보이는 창 4개가 있으므로 단순한 방이 아닌, 대청일 수 있지만, 역시 고창(高窓) 부분이 걸린다. [본문으로]
  9.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에 '서울 군부대'라고 설명된 사진이 실려 있는데, 경기감영 정문을 찍은 것이고 '漢城府(한성부)' 편액이 걸려 있었다. 각종 기록에도 이 시기에 한성부, 한성재판소, 진상 평양대가 경기감영(빈관) 자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경기감영, 고양군청, 대한제국, 선화당, 진위대, 평양대, 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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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탁지부) 관청 청사의 건물 배치 및 변천에 관한 소고(小考) - 2편

※ 1편 글을 올린 지 3개월여 시간이 지났습니다. 12월 말부터 한 달 가량은 평소처럼 움직이기 힘들었고, 그 이후로도 글 작성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 2월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절입니다. 이 시기를 잘 이겨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본 문서에 첨부하는 이미지 파일들의 최초 생성 날짜를 살펴보니 2018년 7월이었습니다. 글을 써나가는 동시에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략 머릿속으로 어떻게 써야겠다고 생각한 상태에서 이미지를 먼저 제작하는 방식을 취하다 보니, 그 당시에 '이런 내용을 설명하려면 여기에 화살표를 넣고 이런 표시를 하고..' 했던 이유가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 되었네요. 1년 반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 때문에 글 쓰는 방식과 절차를 조금은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같은 제목의 글 1편(링크)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905년 8월경 탁지부(度支部) 청사 추정9번 이미지 - 1905년 8월경 탁지부(度支部) 청사


위 9번 이미지는 1편에서 살펴봤던 6번 이미지, 즉 1905년 8월 당시 탁지 청사의 도면에서 확인되는 부분을 호조(戶曹) 〈본아전도〉와 비교하여 강조 표시한 것이다. 도면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은 옅게 처리하였다. 푸른색, 녹색, 빨간색 등의 두꺼운 실선은 호조(탁지부) 관청의 각 구역을 적절하게 나눈 것으로, 아래 11번 이미지와의 비교를 위해 기입한 것이다.

1905년 8월 당시 탁지부는 이전 호조 청사의 전체 면적 가운데 분홍색으로 표시된 당상대청 권역과 노란색으로 표시된 낭청대청 구역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번 이미지의 도면이 당시 탁지부 청사의 모습을 온전하게 담고 있었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관련 기록을 고려하면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탁지부 청사의 중심 지역을 측량한 것으로, 일부 건물이 도면을 작도할 때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위 이미지에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건물 자리에는 1905년 8월 도면에서 금고(金庫)가 들어서 있었다. 본래의 온돌 한옥 건물을 허물고 연와조(煉瓦造)[각주:1] 건물로 신축한 것이다.

호조(戶曹) 청사 추정 평면도 #110번 이미지 - 호조(戶曹) 청사 평면도 : 추정 #1


이상의 자료를 토대로 호조 청사의 원형을 추정해 보면 위 10번 이미지와 같다.

빨간색 화살표 부분은 1편 2번 이미지에서 화살표로 표시한 직선 담장 부분으로, 〈본아전도〉의 남쪽 담장이 역(逆)ㄴ자 형태였다고 가정했을 때의 평면이다.

파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문은 대한제국 시기에 개설된 것으로, 탁지부 청사 터에 더부살이하던 기관[각주:2]을 위해 만든 1칸 대문이다.

㉠의 본래 건물이 1907년 4월 3일에 발생한 화재[각주:3]로 연소된 후, 동년 10월경에 목재 2층 양옥(洋屋)의 ㉡ 건물로 신축된다.

가장 옅은 갈색으로 표시된 건물들은 〈본아전도〉와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를 참작하여 폭넓게 추정한 것이다. 특히 ㉢ 부분이 그렇다.

호조(戶曹) 청사 추정 평면도 #211번 이미지 - 호조(戶曹) 청사 평면도 : 추정 #2


위 11번 이미지는 호조 청사 배치를 추정한 두 번째 평면도이다. 10번 이미지와 다른 점은, 호조 남쪽 담장을 1편 2번 이미지 〈본아전도〉와 동일하게 직선 형태로 추정한 것이다.

9번 이미지에서 푸른색, 녹색, 빨간색 등의 두꺼운 실선으로 표시한 각 건물군을 위 이미지의 실선과 비교하면 상당 부분 두 그림의 평면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88년(정조12)의 〈본아전도〉와 1908년(순종2)의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사이에 120년가량의 시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관청의 건물 배치에는 큰 변화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호조 청사의 실제 모습은 10번 이미지에 가까울까, 아니면 11번 이미지에 근접할까.

청구요람(靑丘要覽) 도성전도(都城全圖) 및 수선전도(首善全圖)12번 이미지 - 청구요람 도성전도(左) 및 수선전도(右) 육조거리 부분


위 12번 이미지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지도(古地圖) 두 점이다. 왼쪽은 1848년(헌종14)에 만들어진 〈청구요람(靑丘要覽)〉 도성전도(都城全圖), 오른쪽은 1864년(고종1)경에 판각된〈수선전도(首善全圖)〉[각주:4]의 경복궁 앞 육조거리[六曹街] 부분이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된 것처럼 호조 관청 아래의 도로가 직선이 아니므로, 호조 청사 평면이 10번 이미지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왼쪽 부분이 약간 꺾여 있으므로 호조 남쪽에 한성부(1870년), 경무청(1895년), 농상공부(1900년) 등이 차례로 들어서고 호조가 탁지부로 개편된 후, 탁지부 경내에 양지아문(1900년), 지계아문(1902년), 한성재판소(1904년) 등이 연이어 입주하면서 그 일대를 중심으로 일부나마 구획 및 도로 정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란색 바탕의 글자인 호조내계(戶曹內契), 호조후동계(戶曹後洞契)[각주:5]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部)-방(坊)-계(契)-통(統)-호(戶)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한성부 주소체계의 한 단계인 계(契)가 호조 청사 앞과 뒤에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앞에서 살펴본 호조 청사 평면도상에 등장하는 건물 가운데 몇 채일지 모르지만 민가(民家)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각주:6] 이는 의정부내계(議政府內契), 이조내계(吏曹內契), 병조내계(兵曹內契) 등도 같다.

서울역사박물관 육조거리 모형13번 이미지 - 서울역사박물관 육조거리 모형 (2012년 촬영)


위 13번 이미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소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육조거리 모형의 호조 부분이다. 전체적인 모습이 1편 1번과 4번 이미지상의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평면을 그대로 적용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탁지부 재정고문실이 한옥 팔작지붕 건물로, 1907년에 목재 2층 양옥으로 신축되었던 1편 4번 이미지의 파란색 화살표 ㄱ자 건물이 ㉠과 ㉡의 한옥 건물 두 채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10번 이미지에서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1900년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 부분의 문(門)도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각주:7]

조선 후기 호조(戶曹) 청사 평면 배치도14번 이미지 - 호조(戶曹) 청사 추정 배치도


위 14번 이미지는 호조 청사 배치도를 10번 이미지(평면도 #1) 형태였다고 가정할 경우의 각 구획별 건물 칸[間]을 산정해 본 것이다.


참고로, 한옥 건축물에서 1칸은 기둥 2개 사이의 공간을 뜻한다. 즉, 건물의 전체적인 길이를 말할 때는 정면열의 기둥 숫자를 헤아려 계산하고, 면적을 말할 때는 정면열 2개 기둥 사이와 측면열 2개 기둥 사이의 장방형 넓이(=기둥 4개로 둘러싸인 바닥 면)를 1칸이라고 한다. 건물 정면에 기둥이 6개, 측면에 3개이면 길이로는 5칸 건물, 면적으로는 10칸(5x2) 건물이 된다. 참고로, 일반적인 한옥의 각 기둥 사이 너비는 약 2m 정도였다.


1편에서 『탁지지』 관사(館舍) 항목에 기록된 호조 관청의 건물 목록을 살펴봤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상청사(당상대청)는 전체 12칸인데, 『숙천제아도』 및 『탁지지』의 〈본아전도〉 그림을 보면 정면 4칸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12칸(4x3) 규모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 모두 퇴(退, 튓마루)가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정면 6칸, 측면 5칸으로 보였을 것이다.[각주:8]

낭관청사(낭청대청)는 4칸의 작은 건물인데, 앞으로 퇴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8칸(4x2) 규모에 가까웠다.

고사(庫舍), 즉 창고는 127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 이미지에서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에 해당한다. 정확한 칸수를 추정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략적인 수준에서 가늠해 보면, 당상청사 북쪽의 고사 40여 칸(20?+24?)은 판별고(版別庫) 44칸, 남쪽의 좌우 고사 약 50칸(24?+32)은 판적사고(版籍司庫) 52칸, 동쪽의 나머지 고사는 세폐고(歲幣庫), 잡물고(雜物庫), 은색고(銀色庫), 별례방고(別例房庫) 등의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에 추정을 더해본다.

청사 북서쪽의 산학청(算學廳)[각주:9]은 6칸이며,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서리장방(書吏長房)을 비롯한 기타 건물군이다. 특히 아래쪽 서리장방 건물군(10번 이미지의 ㉢ 부분)의 배치와 형태에는 상상이 많이 가미되었다.

청사 서쪽과 남쪽의 분홍색 건물은 호조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12번 이미지를 살펴볼 때 언급하였던 호조내계(戶曹內契)의 민가(民家)로 일부나마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각주:10]

9번 이미지에서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했던 부분은 한옥을 대신해 연와조 금고가 들어섰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 추정이 어렵다. 조선시대 각 관청마다 있었던 부군당(府君堂), 즉 신당(神堂)의 위치도 필자가 임의 추정한 것이다.

1900년경 서울 전경 촬영 사진 (서울의 추억)15번 이미지 - 1900년경 서울(한성부) 전경


위 15번 이미지는 1900년(광무4) 무렵의 당시 탁지부 청사를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해상도가 조금 더 높고 선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13번 이미지의 ㉣ 문(門)이 보이지 않는다.

1897년 11월경 서울 육조거리 일부 (명성황후 장례식 행렬)16번 이미지 - 1897년 11월경 육조거리 탁지부 일대


위 16번 이미지는 1897년(광무1) 11월경 촬영 사진이다. 명성황후의 장례식 행렬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5번 이미지보다 약간 이른 시기의 육조거리 모습을 담고 있다. 한때 한성부 청사가 들어 있던 경무청(警務廳) 대문(大門)과 대청(大廳)이 보인다.[각주:11]


- 본 2편의 요약
1) 호조 청사 평면도 추정 : 1편의 4번 이미지 평면도 보완 [10번 이미지]
2) 호조 청사 남쪽 담장 경계 추정 : 조선시대 고지도 비교 [12번 이미지]
3) 호조 청사 배치도 추정 : 호조 주요 건물의 규모 산정 [14번 이미지]


3편으로 이어집니다.



  1. 벽돌을 쌓아 만든 건축물. [본문으로]
  2. 1904년 2월 한성재판소, 1906년 9월 또는 1907년 3월 탁지부 건축소(建築所). [본문으로]
  3. 탁지화재(度支火災),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04월 04일. [본문으로]
  4. 수선전도 원판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4) 제작으로 추정되며,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수선전도는 갑자완산중간본(甲子完山重刊本)이다. [본문으로]
  5. 호조후문계(戶曹後門契). [본문으로]
  6. 민가가 있었다가 관청 부지로 편입되면서 지명만 남은 것일 수 있지만, 구휼(救恤) 명단 등을 비롯한 행정 기록에 이들 명칭이 자주 등장하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실제 민호(民戶)가 존재했을 확률이 있다. 다만, 대한제국 시기에 작성된 호적 문서에서는 호조후동(戶曹後洞), 탁지후동(度支後洞), 군부후동(軍部部後) 등의 몇몇 기록을 제외하면 관련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관청 청사 권역 내에 존재하던 민호들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차 다른 지역으로 밀려났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본문으로]
  7. 1900년경 육조거리 일대를 촬영한 사진(15번 이미지)과 1897년 11월 명성황후 장례식 행렬 사진(16번 이미지)에는 이 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8. 대한제국 시기에 건물 바깥 기둥까지 벽을 올리고 유리창호 내는 형태로 건물이 개조된 후에는 더욱 그렇다. 1편 7번 이미지에 재정고문실과 연결된 문이 개설된 종래의 퇴칸(退間)이 보인다. [본문으로]
  9. 정조(正祖) 임금이 즉위한 1776년에 주학청(籌學廳)로 개칭된다. 왕의 이름인 이산(李祘)과 발음이 겹쳤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육조대로(세종로) 방향으로 난 출구가 없기 때문에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민가의 일반 백성이 호조 대문(大門)을 이용하지는 않았을 것이 때문이다. 여러 개의 작은 문이 관측되는 의정부 청사의 외행랑(外行廊) 부분과 비교된다. [본문으로]
  11. 경무청은 1900년 7월에 경부(警部)로 개편되고, 10월에 육조거리 서편의 사헌부 자리에 있던 농상공부(農商工部)와 청사를 맞교환한다. [본문으로]
관아, 관청, 육조거리, 조선시대, 탁지부, 탁지아문, 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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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탁지부) 관청 청사의 건물 배치 및 변천에 관한 소고(小考) - 1편

※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안팎으로 조금은 바쁜 나날들이었습니다.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세요~!!

※ 작년 6월에 블로그 운영을 재개하고 지금까지 주로 올린 글의 주제가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시기의 관청(官廳, 관아) 청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번에 다룰 '호조(戶曹) 관청 청사의 건물 배치 및 변천에 관한 소고(小考)'는 그러한 여러 편의 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호조 청사에 관한 글을 정리해 올려보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 불로그 재개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짐과 기대가 컸던 것에 비해 내용이 많이 부실할 수 있지만, 하여간 2018년 여름에는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_~;

※ 본 글은 지난 2월에 올린 '광화문 앞 육조거리 6조 관청 청사 실측 평면도' 문서에서 추정한 조선왕조(朝鮮王朝) 호조(戶曹) 및 대한제국(大韓帝國) 탁지부(度支部) 청사의 실체에 관해 조심스럽게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읽기 편하시도록 글을 쓰다 보니, 초안에서 주(注, 주석, 각주, 후주)를 상당수 삭제하고 문단 단위로 글을 짧게 끊어 전체적인 내용을 구성하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더 세밀하게 기술했을 내용이 간략하게 처리되고, 일부 출처나 단어 풀이가 생략된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호조(탁지부) 청사 평면도1번 이미지 - 호조(탁지부) 청사 평면도 : 1908년(左) 1919년(右)


위 1번 이미지는 본래 조선시대 호조(戶曹) 관청이 있었던 지역의 1908년과 1919년 무렵 건물 배치도이다.

왼쪽은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光化門外諸官衙實測平面圖)〉, 오른쪽은 〈경성광화문통관유지일람도(京城光化門通官有地一覽圖)〉이다. 지도에 표기된 것처럼 1908년 당시에는 호조 청사 위치에 호조의 후신인 탁지부(度支部)가 자리해 있었다. 호조 관청이 1894년(고종31) 6월에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일환으로 탁지아문(度支衙問)이 되고, 이듬해 1895년 3월에 탁지부로 다시 개칭되었다.


호조 북쪽에는 원래 한성부(漢城府)가 있었으나, 1868년(고종4) 4월[각주:1] 삼군부(三軍府)에 청사를 내어주고 이전해 온 예조(禮曹)가 위치하다가 학무아문(學務衙門)을 거쳐 학부(學部)로 개편되어 존속하고 있었다.

호조 남쪽은 일반 민가(民家) 자리였는데 1870년(고종7) 5월에 (잠시 경희궁 앞의 훈련도감 신영 자리로 옮겨가 있었던) 한성부 청사가 육조거리 지역으로 돌아올 때 관아 부지로 편입(?)되어 한성부 청사가 신설되었다. 이후 1895년 5월에 한성부가 군기시(軍器寺) 자리로 이전하고, 이 자리에는 경무청(警務廳)이 들어섰다. 그리고 1900년 10월(윤8월)에 경무청이 경부(警部)로 승격되면서 농상공부(農商工部)와 처소를 맞교환하였고, 1907년 12월에 농상공부가 동현(銅峴,, 구리개)으로 이전해 가면서 빈터가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1908년 2월에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가 들어섰다.

호조 청사와 호조 북쪽, 남쪽 지역의 변천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호조 북쪽 : 한성부 - 1868년(1866년?) 예조 - 1894년 학무아문 - 1895년 학부
2) 호조 자리 : 호조 - 1894년 탁지아문 - 1895년 탁지부 - 1908년 법부(法部)
3) 호조 남쪽 : 민가 - 1870년 한성부 - 1895년 경무청 - 1900년 농상공부 - 1908년 법관양성소


오른쪽 지도는 호조(탁지부)의 터가 나중에 2개 필지로 분할되었음을 보여준다. 양쪽에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이 작은 골목길의 좌우 입구인데, 이처럼 도로를 내면서 그 위를 82번지로 하고, 아래를 기존 법관양성소 부지와 합쳐 84번지로 하여 지번을 나눴다.

예조(학부)가 있던 곳은 82번지이며, 82번지 오른쪽 아래에 작은 (민가) 필지로 83번지가 있었다. 이러한 호조 터 중앙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도로 개설과 필지(지번) 통폐합은 분할은 1912년에 제작된 〈경성부지적원도(京城府地積原圖)〉에서 이미 나타난다.[각주:2]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호조 청사의 실체 추적에 들어간다. :)

탁지지(度支志) 본아전도(本衙全圖)2번 이미지 - 탁지지(度支志) 본아전도(本衙全圖), 1788년


위 2번 이미지는 호조 청사의 평면도를 추정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1788년(정조12) 간행 『탁지지(度支志)』 수록의 〈본아전도(本衙全圖)〉이다. 탁지(度支)는 호조의 별칭이며, 본아전도의 본아(本衙)는 '본 관아(관청)'를 뜻한다.

호조의 장관(長官)인 정2품 호조판서(戶曹判書), 차관(次官)인 종2품 호조참판(戶曹參判), 그리고 오늘날의 차관보급에 상당하는 정3품 호조참의(戶曹參議)로 구성된 세 명의 당상관(堂上官)이 근무하는 당상대청(堂上大廳)[각주:3]이 보이고, 그 아래 4시 방향에 정5품(正郞), 정6품 좌랑(佐郞) 각 세 명으로 이루어진 여섯 낭청이 근무하는 낭청대청(郞廳大廳)[각주:4]이 있다.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한 가느다란 담장 부분을 기억해 두자.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호조(戶曹)3번 이미지 -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호조(戶曹), 1839년


위 3번 이미지는 1839년(헌종5)[각주:5] 무렵에 그려진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의 호조 청사 채색 그림이다.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각주:6]라는 조선 후기 인물이 관직 생활을 하며 거쳐 갔던 여러 관청의 도면을 본인이 소장 차원에서 그려둔 화첩이다.

앞에서 살펴본 2번 이미지의 〈본아전도〉와 거의 같은 그림으로, 본아전도를 기반으로 모사하여 그린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림에 주요 건물과 문의 명칭이 표기된 것이 본아전도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당상삼문(堂上三門), 중대문(中大門), 연못[池] 등 백색 테두리의 글자는 『탁지지』 관사(館舍) 항목을 토대로 필자가 임의 기재한 것이다.

『탁지지』 관사 항목의 기록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관사(館舍)

본아(本衙, 호조)는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에 있다. 경복궁 광화문의 왼쪽이며, 북쪽에 한성부[京兆], 남쪽에 고예조동(古禮曹洞), 동쪽에 태복천(太僕川, 중학천)이 있고, 서쪽의 대로(大路, 육조대로) 문밖에 우물이 있다[門外有井].

당상청사(堂上廳事) 12칸[間]. 4면에 퇴가 있고[四面退] 을좌신향(乙坐辛向)이다. 좌우에 아방(兒房) 각 4칸이 있다. ...(중략)...

낭관청사(郎官廳事) 4칸. 앞에 퇴가 있고[前退] 자좌오향(子坐午向)이다. 입직방(入直房) 4칸. 앞에 퇴가 있다[前退]. 우방(右房) 2칸, 다주(茶廚, 부엌) 1칸, 마구간[馬廐] 1칸. ...(중략)...

고사(庫舍) 127칸. 판적사고(版籍司庫) 52간, 판별고(版別庫) 44간, 세폐고(歲幣庫) 9간, 잡물고(雜物庫) 11간, 은색고(銀色庫) 4간, 별례방고(別例房庫) 7간.

연정(蓮亭) 3칸. ...(중략)...

연지(蓮池). 동서(東西) 10보, 남북(南北) 13보. 당상청사 동쪽에 있다[在堂上廳事東].

주학청사(籌學廳事, 산학청사) 6칸. 입직방(入直房) 1칸반, 청(廳, 마루) 3칸, 행각(行閣) 20칸, 고사(庫舍) 8칸, 중문(中門) 1칸.

서리장방(書吏長房). 도장방청(都長房廳) 6칸, 방(房) 2간, 판적사청(版籍司廳) 3간, 방 4간, 문서고(文書庫) 3간, 판별방청(版別房廳) 3칸, 방 4칸, 문서고 5칸, 전례방청(前例房廳) 4간, 방 2칸, 문서고 2칸, 별례방청(別例房廳) 3칸, 방 2칸, 문서고 5칸, 은색방(銀色房) 1간, 청(廳) 1간, 요록색방(料祿色房) 1간, 청 1칸, 잡물색방(雜物色房) 1칸, 청 1칸, 세폐색방(歲幣色房) 2칸, 청 2칸, 응판색방(應辦色房) 2칸, 청 1칸, 별영방(別營房) 1칸, 청 1칸, 별고방(別庫房) 1칸.

서사방(書寫房) 1칸, 청(廳) 1칸.

고직상직방(庫直上直房) 2칸, 청(廳) 2칸.

사령방(使令房) 4칸.

당상삼문(堂上三門, 내삼문), 중문(中門) 1칸, 남협문(南挾門) 1칸, 북협문(北挾門) 1칸. 중대문(中大門) 1칸, 협문(挾門) 1칸.

대문(大門) 1칸. 편액은 지부아문이다[扁以地部衙門]. 후문(後門) 1칸. 편액은 탁지남문이다[扁以度支南門].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및 『탁지지』의 〈본아전도〉에 수록된 호조 청사 그림의 묘사와 관사(館舍) 항목의 기록이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호조(戶曹) 청사 평면도 (건물 배치도)4번 이미지 - 호조(戶曹) 청사 평면도 추정


위 4번 이미지는 1번의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탁지부(호조) 부분을 기초로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호조 청사의 건물 배치도를 만들어 본 것이다.

『탁지지』에 실린 관청 그림과 기록을 참고하였는데, 파란색 화살표로 표시된 건물이 〈본아전도〉의 그림과 (두드러지게) 맞지 않는다. 후문(탁지남문) 왼쪽으로 길게 이어진 건물 대신에 기역(ㄱ)자 형태의 대형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1908년(융희2) 1월경 실측된 평면도에서 본래의 호조 청사와 크게 다른 부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대적인 건물 철거, 신축이 짐작되는 부분이다.

탁지부(度支部) 청사 실측도면5번 이미지 - 탁지부(度支部, 호조) 청사 실측도면, 1905년 8월


위 5번 이미지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의 측량기술자(測量技術者) 양성 과정에 있던 토지측량강습생(土地測量講習生)이 1905년(광무9) 8월경에 측량한 탁지부 청사의 실측도면이다.[각주:7]

왼쪽 도면은 전양지아문양무위원(前量地衙門量務委員) 김한표(金漢杓), 탁지부기수(度支部技手) 이원기(李源綺), 전탁지부양지국기수(前度支部量地局技手) 조명호(趙明鎬) 등 3인, 오른쪽 도면은 탁지부기수 강대성(姜大成), 前탁지부기수 6품 김윤하(金潤夏) 2인이 실측하였다. 이들 5인은 모두 탁지부 사세국(司稅局) 양지과(量地課)의 토지측량강습생 양성 과정에 있었던 삼각측량법(三角測量法) 및 쇄부측량법(碎部測量法) 양성강습 수료자 신분이었다.

이 두 장의 실측도면 중, 왼쪽 도면에서 4번 이미지의 파란색 화살표 부분과 다른 형태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띈다.

탁지부(度支部) 청사 평면도 추정본6번 이미지 - 탁지부(度支部) 청사 평면도 추정, 1905년 8월


위 6번 이미지는 5번에서 살펴본 두 장의 도면을 합친 것이다. 5번의 왼쪽 도면은 연못 우측 부분(서무과, 문서과)이 생략되어 있고, 오른쪽 도면은 좌측(대문)과 하부(교환소, 후문 등)가 생략되어 있었다.

중앙의 대청(大廳)을 중심으로 왼쪽에 고문실(顧問室), 오른쪽에 연못[池)이 있고, 연못 건너로 서무과(庶務課), 문서과(文書課), 대청 아래에 금고(金庫), 출납국(出納局), 출납국 아래에 교환소(交換所), 교환소 왼쪽에 작은 연못[池]이 있다.[각주:8]


분석해 보면, 1905년 8월 도면에서는 파란색 화살표의 건물이 현존하고 있었는데, 1908년 1월 도면(4번 이미지)에서는 기역(ㄱ)자 건물로 변경되었다. ㄱ자 형태의 건물 재건축 부분은 다음 편에서 고찰하기로 하고, 일단 호조 청사의 본래 배치가 어떠했는지만 확인하고 넘어간다.


노란색 테두리로 표시된 고문실(顧問室)에 눈에 띈다. 4번 이미지에서는 정체불명의 건물이었는데, 건물 용도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된 두 개의 긴 담장도 특이하다. 탁지부(호조) 청사의 일부가 다른 용도로 활용되면서 탁지부 경내가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후대에 설치했던 담장으로 보인다.

탁지부 재정고문 그림엽서7번 이미지 - 탁지부 재정고문 그림엽서, 1907년


위 7번 이미지는 탁지부의 재정고문(財政顧問)이었던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목하전종태랑, 메가타 슈타로)의 그림엽서[繪葉書, 회엽서]이다.

러일전쟁(露日戰爭)의 여파로 1904년(광무8) 8월 22일에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각주:9]이 체결되면서 일제(日帝)의 고문정치(顧問政治)가 시작되었으며, 1904년 10월에 일본 대장성(大藏省)의 주세국장(主稅局長) 메가타 다네타로가 대한제국 탁지부의 재정고문으로 취임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07년 10월에 발행한 엽서이다.

엽서 오른쪽에 재정고문실(財政顧問室)[각주:10] 사진이 있는데, 고문실 우측에 탁지부 대청(당상청사)의 일부가 보인다. 이 탁지부 대청은 '병조 청사 당상대청 촬영 사진' 편에서 한 차례 살펴본 적이 있다.

엽서를 보면 일본이 파견한 재정고문이 탁지부 대신(大臣)이 근무하는 대청 바로 앞에 (사진상으로 볼 때) 조적조(벽돌집)로 추정되는 재정고문실 건물을 마련하고 업무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잘 보면 고문실과 대청을 직접 연결하는 난간을 갖춘 통로도 설치되어 있다.

대한제국 내부(內部) 및 군부(軍部) 청사 평면도8번 이미지 - 대한제국 내부(內部) 및 군부(軍部) 청사 평면도, 1908년


위 8번 이미지는 내부(內部), 군부(軍部) 청사의 도면이다. 탁지부 고문실과 비슷한 형태의 건물 평면이 보인다.

내부는 원래 의정부(議政府) 청사였다가 1895년(고종32)경부터 내부 청사로 사용되었으며, 군부는 기존의 병조(兵曹) 청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내부고문실(內部顧問室)이 1907년(융희1) 8월에 폐지되어 내부경무고문실(內部警務顧問室)로 개편되었다가 곧 헌병사령부(憲兵司令部) 청사{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 터}로 옮겨갔기 때문에 실측평면도가 그려진 1908년 1~2월 시점에는 (실제 고문실 건물이었다면) 다른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군부고문실(軍部顧問室)로 추정되는 건물은 기단부가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내부, 군부 등의 고문실에 대한 사항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각주:11]


- 본 1편의 요약
1) 호조 청사 평면도 추정 : 탁지지 관사 항목 기준 [4번 이미지]
2) 호조 남쪽 건물의 원형 추적 : 후문 왼쪽의 건물 평면, 작은 연못 위치 등 [6번 이미지]
3) 호조 대청 앞 건물의 용도 확인 : 탁지부 재정고문실 사진 [7번 이미지]


2편으로 이어집니다.



  1. 또는 1866년(고종3) 5월. [본문으로]
  2.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광화문분실(光化門分室) 설치 시기를 전후로 필지 분할을 추정한다. 추정 시기는 1911년경. [본문으로]
  3. 『탁지지』 관사(館舍) 항목에는 당상청사(堂上廳事)로 기록되어 있다. 당상청(堂上廳), 당상청사(堂上廳舍)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탁지지』 관사(館舍) 항목에는 낭청청사(郞廳廳事)라고 기록되어 있다. 낭관청(郞廳廳), 낭청청사(郞廳廳舍), 낭관청사(郞官廳舍)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책의 주인공인 한필교가 호조좌랑으로 부임한 연도가 1839년 6월 30일이기 때문이다. 그림 오른쪽 위에 부임 관직과 일자가 적혀 있는데, 좌랑과 참의 부임 두 차례의 필적이 서로 다르다. 좌랑으로 부임한 직후에 호조 청사의 그림을 그렸고, 1876년 3월에 다시 호조참의가 되어 부임했을 때 추기한 때문으로 보인다. '평생을 거쳐 온 여러 관아의 그림'이라는 뜻의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자체는 한필교의 관직 경력이 끝나는 1878년을 편찬 연도로 볼 수 있다. 한필교는 화첩의 서문을 1840년에 썼다. [본문으로]
  6. 본관 청주(淸州), 자 보경(輔卿), 호 하석(霞石). [본문으로]
  7. 『한국근대사료집성(韓國近代史資料集成)』 제7권 한일경제관계(韓日經濟關係) 2편 수록 자료. [본문으로]
  8.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도면을 확인했는데 책에 수록된 이미지의 해상도가 높지 않아서 서무과, 문서과 부분은 확실하지 않다. [본문으로]
  9. 협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關한 協定書)〉 [본문으로]
  10. 정부재정고문본부(政府財政顧問本部) 건물 [본문으로]
  11. 외부고문실 건축 도면인 외부고문실(外部顧問室) 건축도형(建築圖形)이 현존한다. [본문으로]
고문실, 관아, 관청, 대한제국, 탁지부, 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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