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글을 올린 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매월 하나씩의 게시물을 올리고자 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래 올리려던 글이 있었는데, 자료 수집과 이미지 작업, 집필 등에 계속 시간이 투입되다 보니.. 어느덧 소논문 수준으로 방대(?)해졌기에 조금 더 간결하게 다듬고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일피일하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고요. 일단 이번 글은 예비로 준비하던 사재감 이야기로 대체합니다. 이 글도 짧게 쓰려고 했지만, 이것저것 덧붙이다 보니 이미지 숫자가 원래 글의 절반을 넘었네요. (이번에는 문체를 부드럽게 써 보겠습니다.) 경복궁(景福宮) 서쪽에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뜨고 있는 마을, 서촌(西村)이 있습니다. 인왕산(仁王山)과 경복궁 사이 지역을 모두..
1910년 8월 29일 11시에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을 발표한 후, 같은 해 9월에 당시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 제3대 통감(統監)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사내정의]가 창덕궁(昌德宮)을 방문하여 순종(純宗) 황제를 '이왕(李王)'으로 봉책(封冊)하는 문서를 전달[獻]한 후 복귀하던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단, 통감부와 일본 본토 사이의 전신(電信) 기록, 기타 관련된 사람들이 남긴 기술에 의하면, 경술국치(庚戌國恥) 직후인 9월 1일에 일제가 창덕궁에 칙사를 파견하여 일왕(日王, 일본 천황)의 한일 병합에 관한 조서(詔書) 사본과 하사품을 순종에게 전달할 때 별도로 이왕(李王) 책봉(봉책) 의식을 시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실제 위 사진과 같은 행동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
※ 본 글은 작년 7월에 올린 '세종로 광화문 앞길 육조거리 의정부 및 육조 관청 배치도' 문서를 보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올리게 될(?) 육조거리 소재 주요 관청에 대한 개별 분석을 예정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일신상의 이유로, 이번 2월에는 이렇게 간략한 글을 올려봅니다.) 위 이미지는 1908년(융희2) 무렵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었던 여러 관청의 건물 배치도를 담고 있는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光化門外諸官衙實測平面圖)〉이다.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제작 시기를 넓게 추정하기도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확대됨) 현재의 광화문 앞 세종대로(세종로)는 조선시대에 육조거리[六曹街]라고 불렸을 정도로 조선왕조의 주요 관청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조(吏曹), 호..
서설. 지난해(2018년) 6월에 본 블로그(아정)의 글을 일부나마 공개 문서로 전환하고 다시 운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후 새로 올린 글들은 주로 조선시대 중앙 관청(관아)의 형태, 변천, 자료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때 계획하기를 한 달에 최소 하나의 새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꿔 2019년, 새해 1월을 맞이하여 '이미지 위주의 글'을 급조해 올려봅니다. (쓰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고, '역사-관아' 카테고리가 아닌 '역사-일반' 카테고리의 글이 되었습니다.) 이하 본문.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경북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뻗어가 서울특별시청과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驛..
※ '창덕궁 돈화문 앞 비변사 청사 터 이야기'에 덧붙이는 글입니다. 본문은 앞서 올린 1편(링크)과 2편(링크)을 참고하세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창덕궁 매표소 주변 종합정비사업부지 내(와룡동 4-1번지)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가 지난 12월 4일에 공개 등록되었다. 창덕궁 매표소 종합정비 계획에 따른 통합관람종합지원센터 건립을 위한 발굴조사 결과 보고서인 것이다. 앞의 글(2편) 말미에서 매표소 권역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비변사(備邊司) 건물과 관련된 담장 석렬(石列), 적심석(積心石) 등이 나왔다고 짧게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창덕궁 매표소 주변 종합정비사업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허가를 신청하기 위한 근거 발굴(2017년 7월 24일부터 7월 28일까지 5일간의 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었..
※ 11일에 올렸던 1편 글(링크)에서 이어지는 비변사 터 이야기입니다. 앞의 글 마지막에 살펴보았던 〈실측도(實測圖)〉에 한글로 주기(注記)를 달아 보면 아래와 같다. 한성부(漢城府) 중서(中署) 정선방(貞善坊)의 '니동(泥洞) 의정부조방지원도(議政府朝房之原圖)'가 도면의 제목이다. 축척은 200분의 1. (1:200) 조선시대 한성부의 주소 체계는 부(部)-방(坊)-계(契)-동(洞)-통(統)-호(戶) 순서로 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구(區)에 해당하는 부는 중부(中部), 동부(東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북부(北部)의 5개로 되어 있었는데, 1894년(고종31)에 갑오개혁((甲午改革)) 당시 부를 서(署)로 개칭하여 중서(中署), 동서(東署), 서서(西署), 남서(南署), 북서(北署)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 궁궐 가운데 하나인 창덕궁(昌德宮), 그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 창덕궁 삼거리 교차로가 있다. 그리고 그 한편에 비변사(備邊司)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5 또는 5-6번지이며, 기념표석에 새겨진 글귀는 아래와 같다. 비변사 터 備邊司 址 조선시대 외적의 방비와 국가 최고 정책을 논의하던 관아 터. 중종 때 창설되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음. 비변사의 정확한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1510년(중종5)에 발생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기점으로 1510년 또는 1517년(중종12) 6월경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1592년(선조25)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기점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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