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척화(斥和)의 청론(淸論)은 위로는 명나라 조정[明朝]을 위하는 것이요, 아래로는 선비들의 여론[士論]을 부지하는 것으로서, 바로 천지(天地)간 불변의 도[常經]이고 고금(古今)을 관통하는 의리[通義]입니다. 그 정론으로 삼는 바는 비록 삼척동자(三尺童子)라고 하여도 다 아는 것이니, 우리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이 조선[東國]의 신하이므로, 나의 군부(임금)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 조정[中朝]만을 위하는 것은 정도를 넘어서는[越津]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만력(萬曆) 황제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해 준 은덕[再造之恩]을 우리나라 군신[我東君臣) 가운데 어느 누가 감격하여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우리나라[我國]가 생사의 위기를 당하여 어찌 옛날에 중흥시켜 준 것만을 ..
조정(朝廷)이 세워져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특히 유학(儒學)을 근본으로 하는 동양(東洋) 국가의 경우가 그러한데, 궁궐(宮闕)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체제를 취하고 관제(官制)와 법령(法令)을 세워 나라의 기틀을 안팎으로 확고히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더하여 중시되는 것이 '역사(歷史)'이니, '천명(天命)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유교적 치도(治道) 개념에 가장 잘 부합되고 국초의 건국(建國) 이념이 오래 전승될 수 있도록 독려하고 견제하는 것이 바로 역사 기록이기 때문이다. 성곽(城郭), 법전(法典), 군신(君臣), 삼군(三軍) 등을 창업(創業)의 필수 요건이라 한다면, 역사는 선례(先例)와 포폄(褒貶)을 분명하게 새겨 후세(後世) ..
한 왕조(王朝)가 세워져 그 기틀이 반석(盤石) 위에 오르기까지는 국좌지재(國佐之材)의 재능을 가진 많은 인물이 국궁진력(鞠躬盡力)으로 힘써야 한다. 창업(創業)의 시기를 지나 종사(宗社)를 만세(萬世)에 전(傳)하는 수성(守成)의 시기에 이르러서도 역시 진충결사(盡忠決死)의 뜻으로 결심하고 호학애민(好學愛民)의 자세로 노력하는 인재들이 많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창업과 수성 사이에 필요한 인재들은 다른 시대에서 빌려올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당대(當代)에서 구(求)할 수밖에 없다. 한낱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선비의 말일지라도 사직(社稷)에 약간이나마 도움 되는 바가 있다면 조정(朝庭)에서 일체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서(史書)에 이르기를, '대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
통신계의 선현이신 공자(工子)께서 이르시기를,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파코즌이 반드시 있다[三人行 必有波高俊]'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는 파고주(波高州)의 영향력이 지대하여 그 혜택이 천하에 두루 미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 때문에 업자(業者)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파코주 주민에게 필태(筆太) 맡기기를 경쟁하듯 하니, 무룻 피씨(皮氏)에게 마음을 둔 사람들이라면 이를 모두 지극히 당연하게 여긴다. 이른바 '필태'라는 것은 붓으로써 크게 시험하는 것이다. 제품의 출시 이전이나 초기에 저잣거리 행인에게 맡겨 품평을 듣고 호불호(好不好)와 장단(長短)을 가리는 것이니, 공자께서도 '아침에 필태를 마치면 저녁에 반납해도 좋다[朝終筆太 夕反納可矣]'고 하시면서 한 권의 책을 남겨 필태의 법을 세우셨..
'단식(斷食)'이란 절곡(絶穀), 절식(絶食)이라고도 하는데, 곧 '음식을 끊는다'는 뜻이다.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아무런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니, 대개 어떤 뜻을 강하게 표출하거나 기필코 스스로 죽고자 할 때 결행하는 행동이다. 옛날에 단식하던 사람들은 반드시 죽을 각오로 하였다. '단식'이라는 두 글자를 생각하고 결심하였을 때 곧바로 실천으로 옮겨 끝까지 고수하였으니, 이를테면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단식 절사(節死)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겉으로 단식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이런저런 궁리와 대책을 끊임없이 한다. 단식하기에 앞서 건강진단을 받아 혹시 건강에 조금이라도 무리가 있지 않을까 점검하기도 하고, 단식에 임해서는 편안한 자리에 누워 의원(醫員)의 정성스러운 예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