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관아 건축물의 배치와 형태를 추론할 때, 우연히 발견한 한 장의 사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진이 없었을 때는 문헌 기록이나 회화에 등장하는 건물의 묘사, 그리고 근래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만을 가지고 실제 건물의 형태와 배치를 추정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고, 보고서나 논문으로 나온 결과물 자체의 정확성에도 의문을 품게 하는 사례가 많다. 사진이 단 한 장이라도 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위 1번 이미지는 경상북도 청하군(淸河郡)의 군청(郡廳) 전경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2018년에 일본 경매 사이트에서 상당한 가격에 낙찰된 회엽서(繪葉書, 사진엽서) 가운데 하나인데, 이 엽서와 같이 낙찰된 사진엽서 한 장이 ..

본 블로그에서 관아 건축에 관한 글을 많이 올리고 있는데, 기초적인 용어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서 이해 증진 차원에서 (저도 아는 것이 없어서 몇 가지만 간략하게)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번 그림은 건물 칸(間)에 대한 내용입니다. 건물 1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1) 건물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 (기둥 2개 사이의 거리) 2) 건물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 (기둥 4개로 이루어진 면적) 어떤 건물이 '4칸'이라고 하면, 정면 4칸으로 이루어진 건물임을 의미할 수도 있고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전체 면적이 4칸인 건물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측면이 몇 칸인지에 따라 전체 면적이 정해집니다(전체=정면x측면). 보통은 면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

울릉도(鬱陵島)에 설치된 울릉군(鬱陵郡)은 전국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군(郡)이다. 면적도 가장 작지만, 인구수가 2022년 4월 기준 9천여 명(9,003명)에 불과할 정도의 소규모 지방자치단체이다. 읍(邑)이나 동(洞)의 승격 또는 분할 기준이 2만 명인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의 독립된 군 인구가 여느 도시의 읍이나 동 규모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울릉군이 처음 군(郡) 단위로 승격되고 군청이 설치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 10월이었다. 당시 내려진 칙령(勅令, 황제의 명령) 일부는 아래와 같다. -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 건 제1조. 울릉도를 울도(鬱島, 鬱嶋)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하여 관제(官制..

최근 지방자치단체에서 조선시대 관아(관청) 건물을 복원하는 움직임이 많이 보이고 있다. 명분은 지역 랜드마크 건립, 지역 주민의 자긍심 고취, 관광자원 건설을 통한 지역 활성화 등을 내세우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시장, 군수 등의 자치단체장 치적 쌓기 사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민선 시장 또는 군수가 자신의 임기 내에 추진하는 이러한 관아 복원의 문제점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짧은 글을 적어 본다. 1. 강원도 원주시 강원감영 복원 (2005년) 옛날 원주(原州)에는 강원감영(江原監營)이 있었다. 감영(監營)은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도청(道廳)에 해당하는 기관이었다. 즉, 조선시대 강원도의 도청이 바로 원주에 있었다. 특히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강원감영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宣化堂)..
명년에는 또 어느 곳에 가 있을지 알지 못한다 : 不知明年又在何處(부지명년우재하처) 인생을 살면서 한 번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고전 문구는 아니지만, 한곳에 오래 정착해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현대 사람들의 처지를 이보다 잘 나타내는 문장이 있을까 싶다. 마음 먹은대로, 계획한대로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지만, 이런저런 이유와 사건들로 인해 몇 년 후에 내가 있을 곳을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평생직장 개념이 흐려진 시기에는,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삶보다는 개인의 행복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이 많아진 지금에는 더욱더 그렇다. 옛날 동양 전통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업이 관직이었고, 그 관직에 진출해 생활하다 보면 지방관이 되어 이곳저곳을 떠도는 경우가 ..
금성(錦城)이 비록 즐겁다고 하지만, 일찍 집에 돌아감만 못하다. [錦城雖云樂 不如早還家] 이 문장은 흔히 '이태백(李太白)'라 불리는 당(唐)나라의 시인 이백(李白, 701-762)의 시 〈촉도난(蜀道難)〉에 있는 글귀이다. 금성은 곧 금관성(錦官城)으로 촉(蜀)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성도(成都)의 별칭인데,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가 성도에서 촉한(蜀漢)을 세웠기에 이런 지명이 낯설지 않다. 촉으로 떠나는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시 〈촉도난〉에서, 이백은 촉 지역으로 향하는 여정의 험난함에 대해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제목에 쓴 문장의 직전 부분은 다음과 같다. 아침에는 사나운 호랑이 피하고 저녁엔 긴 뱀 피해도 [朝避猛虎 夕避長蛇] 이빨 갈고 피 빨아 삼대(麻)처럼 많은 사람 ..

위 사진의 관인(官印), 즉 관청의 인장(印章, 도장)은 1897년 겨울 무렵부터 1908년 11월까지 약 11년간 사용되었던 평안남도 은산군(殷山郡)의 군수(郡守) 직인(職印)입니다. 은산군은 본래 종6품 현감이 부임하던 은산현(殷山縣)이었는데, 제2차 갑오개혁이 시행되던 중이던 1895년(고종32) 윤5월 1일자로 군수가 부임하는 은산군으로 승격됩니다. 다만, 이 당시 승격은 23부제 시행에 맞춰 전국 팔도의 부목군현(府牧郡縣)을 군(郡)으로 일괄 개편한 것이었기 때문에 명칭 변경 이외에 행정구역 조정과 같은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참고로 은산군은 평양부(平壤府, 평양관찰부)에 속한 27개 군 가운데 하나(군을 규모에 따라 나눈 5등급 가운데 4등군)였으며, 이듬해인 1896년 6월에 23부제가 13..